검정 '리본', 이태원 '사고'…무엇을 위한 '통일'인가[뒤끝작렬]

CBS노컷뉴스 박창주 기자 2022. 11. 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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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조 리본, 애도 표현 '통일' 강조
근본 이유 해명 없이 입장만 번복
이미 보편적 謹弔 리본 비축 상태
대대적 추모, 통상 참사·희생 표현
통일성은 '목적'이지 이유가 아님
대한민국 역대 두 번째 국가애도
정부의 혼란 자초, 애도 의미 퇴색
편집자 주
노컷뉴스의 '뒤끝작렬'은 CBS노컷뉴스 기자들의 취재 뒷얘기를 가감 없이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전방위적 사회감시와 성역 없는 취재보도라는 '노컷뉴스'의 이름에 걸맞은 기사입니다. 때로는 방송에서는 다 담아내지 못한 따스한 감동이 '작렬'하는 기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지난 1일 한덕수 국무총리가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입장, 기존에 착용한 근조 리본 대신 길이가 짧고 글씨가 없는 검은색 리본으로 바꿔달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인사혁신처에서 '통일성'을 위해 글씨 없는 검은 리본 지침을 낸 거라고 하더라고요. 자세한 이유는 저희도 모르죠."

행정안전부 관계자가 서울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근조(謹弔)' 한자를 새긴 리본을 사용하느냐를 놓고 오락가락한 배경에 대해 한 말이다.

애초 정부는 참사 직후 국가애도기간부터 지정하고는 지난달 30일, 전국 지자체에 '글자 없는 검정 리본을 착용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취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 같은 '쌩뚱맞은' 지침에 공직·시민사회에서는 애도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축소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럼에도 공무원들은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위에서 시킨 일"이라며 기존에 상시 구비해온 근조 리본을 뒤집어 달거나, 직원 수에 맞춰 글씨 없는 리본을 수천 장씩 새로 주문해야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달 30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달고 '이태원 압사 참사'와 관련, 관계 부처 장관들과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자 지침을 세웠던 인사혁신처는 이틀 만에 "글씨가 있든 없든 관계없이 착용할 수 있다"며 부랴부랴 방침을 뒤집었다. 지자체들은 졸지에 우왕좌왕이 됐다.

인사혁신처는 "검은색 리본 패용 안내 후 관련 문의가 많아 글자 없는 검은색 리본으로 패용하라고 설명했던 것"이라며 경위를 설명했다. 행안부 관계자의 전언대로라면 '왜 글자 없는 리본으로 통일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해명하지 않았다.

대부분 지자체에는 구성원들이 사용할 '통일된' 근조 리본이 비축돼 있다. 이를 감안하면, 정부에서 말한 통일성은 문구 없는 리본 착용의 '목적'이지 이유가 될 수 없다. 이미 균일한 애도물품이 있는데, 애써 글씨 뺀 리본으로 획일화하려 했는지 여전히 의문이라는 얘기다.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사망자를 위한 합동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헌화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통일성에 대한 정부의 집착은 이뿐만이 아니다. 합동분향소에 표기할 용어를 놓고는 참사 대신 '사고'를, 희생자가 아닌 '사망자' 사용을 지침으로 정해 책임 회피 논란에 부딪혔다.

이번에도 행안부는 참사와 희생자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입장을 번복하며, 해명 과정에 거듭 '통일'에 방점을 찍었다. 박종현 행정안전부 사회재난대응정책관이 "재난 관련 용어는 매우 많은 기관이 협업하기 때문에 '통일'해야 된다는 취지였다"고 말한 것이다.

허나 분향소 문구 역시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한 경우, 추모 과정에서는 참사와 희생자라는 표현이 통상적으로 사용돼왔다. 謹弔 박힌 리본이 보편적인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윤석열 대통령도 참사 직후 첫 담화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과 참사가 발생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굳이 일반 상식을 논하지 않더라도 공권력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희생자들에게 예우라도 제대로 해야 되는 것 아닌가"라는 한 평론가의 일침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정부의 변덕에 애꿎은 일선 지자체들은 용어를 바꾼 곳과 그렇지 않은 곳으로 갈리며 또 다시 혼선을 피하지 못했다. 자치단체장 소속 정당이 어디냐, 또는 정부 예산지원 눈치를 보느냐에 따라 용어 선택이 엇갈렸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논란은 계속 가지치기 중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지난달 31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핼러윈 참사'로 숨진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이런 상황 속에 구태여 통일되고 객관화된 애도 기준을 들이대며 스스로 혼란을 자초한 정부의 의중을 도무지 헤아리기가 힘들다. 더욱이 사태 수습과 유가족을 보듬는 게 우선이라며 애도기간을 지정한 게 국가 아니었던가.

일반적인 근조 리본과 추모의 단어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가운데, 상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애도의 형식을 일치시키려던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함이었을까.

그 답을 얻기도 전, 156명이 소중한 목숨을 잃은 지도 이날(5일)로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역대 두 번째 국가애도기간의 마지막 날은 이대로 저물어가고 있다.

애도기간 내내 추모의 수단과 표현에 대한 논란만 확산하며, 세간이 우려했던 것처럼 애도의 의미만 퇴색된 것은 아닌지 씁쓸함만 남는다. 이 또한 정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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