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회피·전가·허위보고…참사 후 여실히 드러난 국가의 민낯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고 일주일이 흘렀다. 참사의 원인이 국가 시스템 부재에 있었다는 사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사고 이후 일주일 간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국가의 모습 또한 처참했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질 주무 장관은 "경찰·소방을 미리 배치해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라고 발언을 하는가 하면, 해당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지자체장은 "저희는 전략적인 준비를 다 해왔다"라며 책임 회피 발언을 했다.
심지어 관계 부처 간 책임자들이 서로 자신의 말이 맞다며 일방적으로 통화내역까지 공개하면서 진실공방을 벌이는 등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참사 당일 현장 상황을 기록한 경찰 상황보고서에는 관할 경찰서장의 현장 도착 시간이 실제보다 약 45분이나 빨리 적혀 있는 등 허위 기재 정황까지 포착됐다. 대형 참사 앞에 국가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지적이다.
4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달 29일 오후 6시 34분 코로나19로 인한 실외 마스크 해제 이후 첫 핼러윈을 맞아 이태원을 찾은 한 시민은 '해밀톤 호텔 부근 이마트24 편의점' 앞에서 112에 "골목이 지금 사람들하고 오르고 내려오고 하는데 너무 불안하다. 사람들이 내려올 수 없는데 계속 밀려 올라오니까 압사 당할 것 같다"며 "인파가 너무 많은데 통제 좀 해주셔야 될 것 같다"고 신고했다.
경찰이 출동했지만 오후 8시 11분 자체 종결했다. 이후로도 경찰에는 '압사'를 언급하는 신고가 총 11번 이어졌지만, 경찰은 이 중 절반도 채 되지 않는 4건만 현장에 출동했고, 7건은 전화 안내만 하고 종결했다. 현장에 있던 시민들이 참사 약 4시간 전부터 수차례 국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외면당한 셈이다.
결국 오후 10시 15분부터 일부 시민들이 인파에 밀려 넘어지기 시작했고, 압사 사고로 이어져 사망자 156명, 부상자 157명을 낳은 대형 참사를 낳았다.
경찰은 참사 당일 이태원에 1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릴 것을 미리부터 예상했지만, 마약 단속에 인력 배치를 집중했고 질서유지를 위한 경비 인력이나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해 상부로 보고를 올려야 할 정보 경찰은 '0명'이었다. 경찰 배치만 균형 있게 했어도 '막을 수 있었던 참사'라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사고 이후 수습 과정에서도 정부는 책임을 외면하기 바빴다. 참사 다음 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코로나19가 풀리는 상황이 있었지만 파악하기로는 예년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었다"며 "경찰·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발언해 논란을 일으켰다.
행안부는 경찰·소방을 관할하는 등 국민의 안전을 책임질 정부 주무부처인데, 대형 참사가 발생했음에도 하루 만에 주무 장관 입에서 책임 회피성 발언이 나온 것이다. 심지어 이 장관은 "당일 서울 시내 곳곳에서 여러 시위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곳으로 경찰 경비 병력들이 분산됐다"고 말하는 등 주말 발생한 집회·시위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결국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비판이 일자 이 장관은 참사 사흘 만에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 현안보고에서 "국가는 국민 안전에 무한책임이 있다"며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국민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한 후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현장을 관할하고 있는 관계 부처 간의 진실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울청 112종합상황실은 지난달 31일 "사고 당일 현장에 있던 용산경찰서 112상황실장이 오후 9시 38분쯤 전화상으로 무정차 통과를 요청했다"며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승하차 인원이 예년과 차이가 없다며 정상운영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서울교통공사는 "사실이 아니다. 저희는 정확하게 오후 11시 11분에 요청을 받은 것으로 확인했다"며 "밤 9시 38분 통화는 이태원역장이 이태원 파출소장에게 역사 출입구를 통제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사고 발생 전에 경찰에서 무정차 요청한 적은 없다"고 반박했다. 오히려 사고 소식을 듣고 밤 11시 6분쯤 이태원역에서 공덕역 방향으로 가는 열차를 1대 추가 운행하기도 했다는 입장이다.
이에 서울청 112종합상황실은 "29일 오후 9시 38분 서울교통공사 관계자가 용산서 112상황실장에게 전화를 했으나 끊어졌고, 용산서 112상황실장이 즉시 역발신해 1분 17초간 통화하며 무정차 요청을 했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와 오후 11시 11분에는 통화한 기록이 없다"며 서울교통공사 관계자와의 통화기록까지 캡처해 공개했다. 반박에 재반박을 넘어 재재반박까지 이어지는 등 눈살을 찌푸리는 공방을 벌인 셈이다.
또 경찰과 상인회 간의 주장이 엇갈리기도 했다. 용산서 112상황실장은 "상인회 부회장이 지난해 '경찰과 기동대가 너무 과도하게 배치돼 영업이 안 됐다'며 과도한 경찰력 배치 자제를 요청했다"고 주장하자 상인회 측은 "경찰력 배치 자제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대로변에 기동대 차량이나 경찰차를 주차하면 시민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으니 골목 등 안 보이는 곳에 주차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관할 서장이 참사 당일 현장에 도착한 시간을 허위로 보고 또는 기재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당일 경찰이 작성한 상황보고서에는 이임재 용산서장의 현장 도착 시간이 참사 발생 5분 뒤엔 오후 10시 20분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감찰 결과 실제로는 오후 11시 5분에 도착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상황보고서가 허위로 적힌 경위에 대해 조사 중이다.
이외에도 '참사냐 사고냐', '사망자냐 희생자냐' 등 단어를 두고 논쟁이 오가는가 하면, 인사혁신처에서 공무원들에게 '글씨 없는 검은 리본을 달라'고 공문을 보내면서 논란이 일었다. 공무원들은 기존에 상시 구비해 온 근조 리본을 뒤집어 달거나 글씨 없는 검은 리본을 새로 주문해야만 했지만, 이틀 만에 "글씨가 있든 없든 관계 없다"고 방침이 뒤집히면서 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의 발언도 구설수에 올랐다. 박 구청장은 참사 이틀 뒤 MBC와의 인터뷰에서 "저희는 (핼러윈 대비) 전략적인 준비를 다 해왔다.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다"며 "이건 축제가 아니다. 축제면 행사의 내용이나 주최 측이 있는데 내용도 없고 그냥 핼러윈 데이에 모이는 일종의 어떤 하나의 '현상'이라고 봐야 된다"고 언급했다. 자신과 용산구청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뜻이다.
이에 용산구청 홈페이지에는 박 구청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글이 100건 이상 올라오고 있다. 한 시민은 "용산구청장의 인터뷰를 보면 용산구민인 게 화가 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시민은 "지금도 간간이 앰뷸런스 소리가 들릴 때마다 눈물이 난다"며 "이제 깊은 슬픔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바뀌고 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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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서민선 기자 sms@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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