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칼럼] 대통령, 국민 마음 아우르며 정위치로 복귀해야
北 핵미사일 위협 눈앞 현실돼 準戰時 상황 흡사
처참하고 안타깝고 어처구니없는 사태 앞에선 할 말을 잃는다. 이태원 현장에 무슨 설명을 보태고 어떤 말을 덧댈 수 있겠는가. 언론에 보도될 만큼 큰 재난(災難)이 닥치기 전엔 그보다 작은 재난이 29번 발생하고,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비켜가 묻혀버린 사건이 300건이 된다는 게 재난에 관한 ‘하인리히 법칙’이다. 지하철 여러 노선이 엇갈리는 신도림역 출퇴근 시간엔 인파에 떠밀려 계단을 오르고 떠밀려 내려간다. 수십 년 동안 큰일 없었던 게 기적 같다. 이태원은 그래서 우리를 침묵하게 만든다. 대통령은 닷새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분향소를 찾아 애도(哀悼)하면서 입을 떼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국가 애도 기간에도 장거리 탄도미사일·단거리미사일을 섞어 쐈다. 올해 들어서 34차례 81발의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단거리 미사일·잠수함발사미사일·대형방사포 포격이 며칠 간격으로 이어졌다. 미사일은 NLL 남쪽에도 떨어졌다. 북한은 한미 공군 연합훈련에 시비를 걸었다. 남쪽을 과녁으로 단거리미사일, 미국을 겨냥한 장거리미사일을 섞어 쐈듯 핵실험도 ‘미국 보라’며 전략 핵무기, 한국을 위협하는 전술 핵무기 실험을 동시에 할 가능성이 크다.
할 말을 잃은 순간만큼 꼭 듣고 싶은 말이 절실하게 기다려지는 때도 없다. 1986년 1월 28일 미국 플로리다에서 아이들 손을 쥔 가족 인파가 좁은 물목 건너 우주선 발사 기지를 지켜봤다. 미국 초등학교 학생의 40%가 거실 TV 앞에 모였다고 한다. 우주왕복선 챌린저 10호 비행승무원에 여자 선생님이 선발돼 더 어린이들 관심을 끌었다. 추운 날씨 탓에 몇 차례 발사가 늦춰지던 챌린저호가 오전 11시 40분 불기둥을 내뿜으며 치솟는 순간, 발사 기지 주변과 각 가정 TV 앞에서 큰 환성(歡聲)이 터졌다. 환성은 이내 비명으로 바뀌었다. 발사 73초 만에 로켓이 거대한 구름을 만들며 폭발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북한 위협은 과거와 차원(次元)이 다른 위협이다. 핵폭탄을 탑재한 미사일 위협이다. 김정은은 올해 핵무장법을 제정해 핵무기로 대한민국을 선제(先制)공격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전술 핵무기 부대 훈련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미국은 1991년 9월 미·소 합의에 따라 한국에서 전술 핵무기를 철수했다. 북의 핵무기 개발 이후 한반도 핵 균형은 무너졌다. 김정은은 한국이 ‘미국 전술 핵무기 재배치’ ‘미국 핵무기의 유럽식 한미 공유(共有)’ ‘독자적 핵무기 개발’ 중 어느 방안도 선택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사실 한국의 남은 선택은 북한 핵 공격을 받으면 미국이 북한 핵 공격을 무릅쓰고 한국을 핵으로 보호하겠다는 확장 억지(抑止) 정책 강화밖에 없다. 김정은은 한국 국민에게 확장 억지 정책을 정말 믿느냐고 조롱하고 있다. 미국엔 전략 핵무기를 들이대며 한반도 문제에 휘말려들지 말라고 동맹을 이간질하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챌린저호 폭발 5시간 20분이 지난 오후 5시 연설대에 섰다. ‘승무원들은 인류의 지평선(地平線)을 넓히기 위한 탐구와 발견 과정을 이끈 용감한 분이었습니다. 미래는 겁쟁이 몫이 아닙니다. 미국은 머뭇거리지 않고 그 뒤를 따라갈 것입니다.’ ‘챌린저 승무원들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했습니다. 미국은 승무원들이 대지를 박차고 올라 하느님의 얼굴을 만진 오늘 아침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대통령이 희생자의 죽음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자 할 말을 잃었던 미국 국민은 말을 되찾았다.
때 이른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 살아있는 온갖 생명에 의미가 깃들듯 모든 죽음에는 의미가 담겨야 한다. 이태원에 떨어진 봉오리 하나하나가 국민 가슴속에 꽃으로 피어나 더 안전한 사회로 가는 디딤돌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그들이 망각(忘却) 속에 묻히지 않도록 기억의 끈으로 그들과 우리를 단단히 묶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대통령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력(戰力)과 각오를 오판(誤判)해 전쟁을 일으켰다. 시진핑이 멀지 않은 장래에 중국 국력(國力)이 미국을 능가하리라고 확신했다면 대만 무력 통일을 이렇게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가슴 한편에 시간은 중국 편이 아니라는 불안이 커가고 있다는 신호다. 김정은 마음도 같을 것이다. 신호등이 고장 난 네거리에서 김정은은 ‘문재인 시대로 돌아가라’고 한국을 협박하고 있다. 국방부가 ‘남북 대화로 안보를 다진다’던 그 시대로. 대통령은 흩어진 국민 마음을 아우르며 정위치(正位置)로 복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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