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척거리다’ ‘바디감’이란 말에 性的 수치심 느끼나요?
‘성인지 감수성’ 예민한 시대
MZ는 왜 ‘전원일기’가 불편할까
‘샤르도네는 원숙미 넘치는 30~40대 여성, 소비뇽 블랑은 톡톡 튀고 발랄한 10~20대 여성….’
와인 회사 홍보 담당자인 A씨는 최근 PPT(파워포인트) 작업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와인 품종을 소개하려고 예전에 출간된 책과 자료를 정리하다가 ‘불편한’ 표현이 눈에 띈 것이다. 그는 “업계에서 흔히 써온 비유가 있다. 화이트 와인은 우아하고 부드러운 여성, 레드 와인 중에서도 카베르네 소비뇽은 우락부락한 근육질 남성에 빗대는 식인데, 요즘 MZ세대 고객 앞에서 무심코 썼다간 난리 나겠다 싶어서 적절한 표현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전원일기’가 힐링 드라마?”
사회 전반에서 이른바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과거엔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발언이나 행동에 불편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회사원 김상미(29)씨는 종영한 지 20년 넘은 드라마 ‘전원일기’를 ‘다시 보기’ 하다가 불편해졌다. “주변에서 마음 편히 힐링할 수 있는 전원 드라마라고 해서 봤더니 황당하고 폭력적이더라. ‘한국의 아버지상’이라는 김 회장은 늙은 아내에게 너무 무례하고 함부로 대하는데도 동네에서 큰 어르신이라고 존경받고, 김 회장 댁 식사 장면에선 남녀가 겸상도 안 한다. 일용이는 ‘여자가 어디서 감히!’ ‘시키는 대로 하지 못해?’ 같은 말을 내뱉고, 빗자루로 아내를 때리려 드는 장면도 나온다. 불과 20~30년 전인데 너무 가부장적이라 거북했다.” 어릴 때 ‘전원일기’를 즐겨 봤다는 정미선(47)씨도 “그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 놀랄 만한 장면이 많긴 하더라. 1980~90년대 한국 사회가 얼마나 남성 중심 사회였는지,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소셜미디어에는 “옛날 드라마를 찾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낀다”는 후기가 종종 올라온다. ‘사랑을 그대 품 안에’(1994)에서 백화점 이사인 강풍호(차인표)는 비서에게 “치마가 5㎝만 짧으면 훨씬 더 이쁘겠네요”라며 윙크한다. 요즘 같으면 직장 내 성희롱으로 고소감이다. 평균 시청률 37.5%를 기록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2005)은 ‘노처녀 김삼순의 삶과 사랑을 경쾌하게 그려낸 드라마’라는 설정인데, 삼순이(김선아) 나이가 겨우 서른이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디지털 기술이 가진 불멸성, 소비자에게 더 다양한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플랫폼 사업자들의 욕구가 맞아떨어지면서 과거 흥행했던 작품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며 “‘전원일기’가 대표적인데 나이 든 세대는 그리움을 느끼지만 젊은 세대는 독특하다며 즐겨 보다가 불편해졌다는 사람들이 있다. 콘텐츠를 보면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여성 신체 적나라한 묘사 불편해
성공한 문학 작품도 도마에 오른다. 40대 여성 최모씨는 “오래전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다가 여성의 신체를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한 대목에서 불쾌해졌다”며 “이런 소설이었나 새삼 놀랐다”고 했다. 소설가 김훈은 과거에 쓴 단편소설로 2017년 뒤늦게 ‘여성 혐오’ 논란에 휩싸였다. 2005년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언니의 폐경’에서 생리를 묘사한 장면이 문제가 됐다. 실제 생리 현상과 거리가 먼 관음증적 표현이고, 여성의 몸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 중심적 시각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장편소설 ‘공터에서’는 유아 성기를 묘사하는 구절에 대해 “읽기 불편하다”는 독자 반응이 나왔다.
김훈은 당시 기자 간담회에서 “여자를 ‘생명체’로 묘사하는 건 할 수 있지만 역할과 기능을 가진 ‘인격체’로 묘사하는 데는 서투르다”고 말해 논란을 키웠다. 한 출판사 편집자는 “김훈이 이룬 문학적 성취는 분명하지만, ‘칼의 노래’부터 시작해서 여성을 사유 능력 없는 존재로 형상화하고, 역사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인식은 문제”라며 “독자들은 점점 더 예민한 감수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있다”고 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엔 젠더 폭력이나 차별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은 그렇게 여겨지는 시대가 됐다. 작가나 예술가의 표현 행위도 인간의 존엄을 침해한다면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질척거리다’ 국회서 논란
이에 대해 “과도한 검열” “공감하기 어려운 주장”이란 지적도 나온다. 예컨대 식음업계 일부에선 ‘바디감’이란 용어를 대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바디감(body感)은 와인이나 위스키, 커피 등을 감별할 때 입안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을 뜻하는 용어. 그러나 장보리 소믈리에는 “와인의 맛을 여성과 남성에 비유하는 건 문제지만, 바디감이라는 용어마저 불편해한다면 듣는 사람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고 했다.
지난달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선 ‘질척거린다’는 표현이 논란이 됐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의 답변 태도를 지적하면서 “예, 아니오만, 좀 해달라는 대로 해주세요. 시간도 없는데 왜 이렇게 질척거리십니까? 좀 깔끔하게 하십시다”라고 말했다. 전 위원장은 “질척거린다는 표현을 쓰셨는데요, 굉장한 성적 수치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발언을 취소하시고 사과를 부탁드립니다”라고 했다. 윤 의원은 “성적인 의미가 전혀 아니었다. 깔끔하다의 반대말로 썼다”면서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시고 질책하신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고 답했다.
며칠 뒤 문체위 국감에서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이 이 언쟁을 소환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질척거리다’의 사전적 의미는 ‘진흙이나 반죽 따위가 물기가 매우 많아 차지고 진 느낌이 자꾸 들다’이다. 배 의원은 장소원 국립국어원장에게 “‘질척거리다’가 사전적으로 외설적 의미가 담긴 말이냐”고 물었고, 장 원장은 “아니다. ‘질척거리다’라는 동사는 ‘질다’는 형용사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습기가 많다는 뜻”이라고 답했다.
네이버 오픈사전에는 이 동사의 어근인 ‘질척’에 대해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달라붙는 모습을 표현한 말. 상대방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끈질기게 부탁을 하거나, 이미 헤어진 연인 관계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매달리는 모습 등을 의미한다”는 풀이가 올라와 있다. 한 국어학자는 “단어의 용례를 봐도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는 건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전 위원장이 단어의 뜻을 잘 모르고 오해했거나, 정치적으로 활용한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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