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정치 고수들의 선한 선문답
전쟁과 혁명의 세기였던 20세기, 그 가운데 인류에게 희망을 보여준 시기가 있었습니다. 독일이 통일된 1990년 전후입니다. 지금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푸틴,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며 홍콩을 중국 체제로 편입하고 대만 무력 합병을 위협하는 시진핑 등 권위주의적 지도자들 때문에 세계 평화와 안정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트럼프에게서 시작한 미국 우선 정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90년 전후의 시기엔 상대방을 배려하며 인류애와 인류 평화를 실현하려는 정치 지도자가 많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국가 수뇌는 아니지만 서독과 소련의 외무 장관인 겐셔와 셰바르드나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신뢰와 배려에 바탕을 둔 협상 과정을 보노라면 진한 감동을 느낍니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대변인이 기자회견에서 실수하는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해 독일 통일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통일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이 소련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소련 정부로서는 당시 독일 통일을 찬동하기에는 큰 부담을 안고 있었습니다. 우선 소련 국민의 반(反)독일 정서 때문입니다. 소련 사람들에게 독일은 자국민 2500만명을 희생시킨 악마와 다름없었습니다. 이 점을 의식해서 두 외무 장관은 최초 회담을 소련의 작은 도시 브레스트에서 열었습니다. 그곳은 전쟁 초기 독일 침공으로 큰 피해를 본 곳으로 셰바르드나제의 고향이었고 그의 형도 그곳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벌이는 회담은 비극의 역사는 잊지 않되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함을 암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겐셔는 회담 시작 전에 전쟁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함으로써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음 회담은 1주일 후 서독의 뮌스터 시청에서 열렸습니다. 그곳은 1648년 유럽 대륙을 전쟁터로 만들었던 30년전쟁이 끝나고 강화조약을 체결한, 화해와 새 출발이라는 역사적 상징성을 지닌 장소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데 한 원인이 된 동독 탈출 난민들의 체코 프라하 소재 서독 대사관 난입 사건 때에도 그들은 서로 협조하였습니다. 1989년 9월 28일 동독 탈출 난민 4000여 명이 대사관에 난입해 서독 망명을 요구합니다. 당시 유엔 총회가 열릴 때라 두 장관은 뉴욕에서 만나 협상을 벌입니다. 협상이 아니라 서독의 일방적 협조 요청입니다. 동독 정부에 영향력이 있는 소련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겐셔의 설명을 듣고 있던 셰바르드나제는 “그들 가운데 여성과 아이들은 몇 명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겐셔 장관이 알지 못하는 내용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겐셔는 주저 없이 “750명 정도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셰바르드나제는 “여성과 아이들의 고통이 심하겠군요. 본국에 연락하여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회담장에서 나오면서 겐셔의 보좌관이 물었습니다. “장관님, 750명은 무슨 근거로 말씀하셨습니까?” 겐셔는 “훌륭한 외교관은 평소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하며 웃었습니다. 셰바르드나제는 협조하고 싶었고 또 합당한 인도적 명분을 만들어 본국을 설득하고 싶었기에 넌지시 아녀자들의 숫자를 물었고, 이를 알아챈 겐셔는 그에 맞게 화답한 것입니다. 정치 고수들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선(善)한 선(禪)문답이었습니다. 겐셔는 곧 프라하로 날아가 난민들의 서독 이송을 진두지휘합니다. 당시 겐셔는 심장병을 앓고 있어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제가 당시 겐셔 장관 보좌관이었던 분에게서 직접 들은 것입니다.
이런 치밀한 계산과 배려는 정치 지도자의 상호 신뢰, 존중과 우정이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결국 국가 간 외교 관계도 인간관계의 연장입니다. 오랜 경험과 경륜을 가진 지도자들이 필요하고, 밉든 곱든 정치 지도자들이 자주 만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그에 앞서 필요한 것은 좋은 자질과 인품을 지닌 지도자를 갖는 것입니다.
한독포럼 참석차 베를린으로 떠나려니, 20세기 말 그 좋았던 시절의 정치인들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안타까운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 가능성을 현장 가까이서 알아볼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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