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적 쌓기·성급한 해결 좇은 포퓰리즘이 초래한 레고랜드 사태
‘레고랜드 사태’의 전말
“김진태가 금융시장에 폭탄을 던졌다!”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를 두고 나온 말이다. 레고랜드 개발에 들어간 2050억원의 채무에 대해 강원도가 지급 보증을 거부하겠다는 김 지사 발표 이후 채권 및 부동산 대출 시장은 급속히 얼어붙었고, 각 지자체와 기업이 채권 발행으로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결국 강원도는 “도 예산으로 2050억원 채무를 12월까지 갚겠다”고 밝혔고, 정부는 금융 시장 안정을 위해 ‘50조원+α’를 투입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김 지사를 향해 “2050억원으로 해결할 일을 50조원 규모로 키웠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이유다.
김 지사는 “어려운 자금시장에 불필요한 혼란과 오해를 초래해 매우 유감스럽다”고 사과했지만, 논란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야당에선 “정부·여당의 무능이 드러난 사태”라고 비난하고 여당에선 “최문순 전 지사의 무리한 레고랜드 유치가 사건의 발단”이라고 받아친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강원도 “디폴트 선언 아니다”...금융권은 ‘실소’
현 사태의 발화점은 지난 9월 28일 김 지사의 발표다. 이날 김 지사는 “강원도는 강원중도개발공사(GJC)가 BNK투자증권에 빌린 2050억원을 대신 갚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GJC에 대해 회생신청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GJC는 춘천 의암호 한복판에 떠 있는 중도(中島)에 레고랜드와 복합관광단지 등을 개발하기 위해 강원도가 설립한 회사다.
GJC는 레고랜드 개발을 위해 2020년 BNK 투자증권에 2050억원 규모의 채무를 냈다. 이 채무를 내기 위해 발행된 채권에 강원도는 지급 보증을 했다. GJC가 파산하더라도 강원도가 채무를 대신 갚겠다는 뜻이다. 국채에 준하는 신뢰를 받는 지방채를 발행한 셈이다.
그런데 채권 만기일인 9월 29일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 김 지사가 GJC를 회생신청하겠다고 밝혔다. 경영 실적이 나쁜 GJC가 파탄에 직면했고, 강원도는 채무를 대신 갚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 그러자 BNK투자증권을 비롯한 금융권은 이를 사실상의 ‘디폴트(default) 선언’, 즉 채무 불이행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강원도는 채권 만기를 추가로 연장하지 않았고, 결국 2050억원의 채권은 부도 처리돼 하루아침에 종잇조각이 됐다.
여파는 강력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김 지사의 선언은 ‘정부가 보증하는 채권도 정치적 논리 때문에 채무 불이행이 날 수 있다’는 신호로 시장에서 작동했고, 이로 인해 다른 채권의 신뢰도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채와 다름없는 것으로 평가받는 한국전력공사의 채권이 팔리지 않는 일까지 나타났다. 금융권에서는 “기준 금리가 4%인데 지금은 채권 금리를 10% 한다고 해도 투자가 안 들어오는 실정”이라는 말이 돌았다. 이른바 ‘돈맥경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강원도는 대체 왜 GJC의 채무를 갚지 않겠다고 나선 것일까. 강원도 측은 “지급 보증을 거부한 것이 결코 아니다”는 입장이다. 도청 관계자는 “발표 전부터 BNK 투자증권 쪽에 ‘GJC를 회생신청하더라도 지급 보증을 거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의사를 전했고 계속 협의해왔다”고 말했다. 관계자는 또 “GJC를 아직 회생신청 하지도 않은 상황인 데다 2050억원 채무에 대해 내년 1월까지의 이자 38억원도 이미 지급했다”고 말했다. 즉 강원도는 GJC를 정상화해서 채무를 갚겠다는 취지였는데 BNK에서 일방적으로 채권을 부도 처리하면서 사태가 일파만파 커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금융권은 냉담한 반응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이자 납부는 연장을 협의하는 기본 조건이지 연장이 되는 필수 요건이 아니다. 이자를 냈어도 원금을 못 내겠다며 회생신청 의지를 밝힌 것 자체가 문제”라고 했다. 또다른 인사는 “아들이 진 빚에 보증을 선 아버지가 채권자에게 ‘아들을 호적에서 파겠다’고 통보한 것이 이번 사태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반면, 현재 자금시장의 어려움을 김 지사의 전적인 책임으로 몰아세우는 건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김 지사 발언이 있기 전부터 이미 고금리 영향으로 채권과 금융 시장이 얼어붙고 있었다는 것. 박창균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조정실장은 “김 지사 발언이 잘못된 신호를 준 것은 맞지만, 지금 금융시장 상황이 워낙 좋지 않은 탓에 하나의 기폭제가 된 것”이라며 “금융시장 거래가 활발했다면 2000억 정도의 디폴트는 그냥 흡수했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가 발표한 50조원에 대해서도 “50조원을 날리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채권을 사는 거고 채권을 갚으면 50조원이 회수되는 거다. 대부분은 정상 상환된다”고 설명했다.
◇계속된 우려에도 레고랜드 밀어붙인 최문순
금융 전문가들 사이에선 GJC가 애초에 2050억원을 상환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 레고랜드 사태의 더 본질적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무슨 얘기일까.
현재 레고랜드의 운영과 이에 따른 수익은 영국 멀린엔터테인먼트가 소유한 레고랜드코리아에 있다. GJC의 주 수익은 레고랜드 개발에 참여한 대가로 레고랜드 매출을 레고랜드코리아로부터 배분받는 것과 중도에 직접 개발한 토지를 판매하는 것이다.
문제는 레고랜드 매출에서 얻는 수익 배분은 그야말로 ‘쥐꼬리’ 수준이라는 점. 입장료 수익은 연 200만명이 다녀간다 해도 2억원 정도밖에 배분받지 못한다. 실제 입장객 규모도 기대 이하다. 레고랜드를 유치할 때만 해도 “월 16만~17만명이 찾을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지난 5월 개장 첫 달에 13만명이 다녀갔고 세 달 뒤에는 7만명으로 급감했다. 방문객들 사이에선 “기대보다 즐길 거리가 없어 다시 올 만한 곳은 아니다”라는 말이 돌았다. 설상가상 개장한 지 3개월 새 놀이기구가 멈춰 서는 등 안전사고가 다섯 차례나 벌어지는 악재도 겹쳤다. 레고랜드는 내년 1월부터 약 3개월간 임시 휴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레고랜드에서 발생하는 임대료 매출은 연 400억원 이하일 때 한 푼도 배분받지 못하고, 400억원 초과 600억원 이하인 경우에는 약 3%인 1억2000만원가량을 배분받는 수준이다. 중도에 개발한 토지 판매도 지지부진하다. 중도 토지의 4분의 3은 여전히 허허벌판으로 남아있는 실정. 레고랜드 유치 과정 내내 “혈세를 투자해 유치한 레고랜드 수익은 고스란히 외국 기업이 가져간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다. 레고랜드 측에 무상 임대한 부지 가격과 교량 설치, 대규모 주차장 건설, 전기와 상하수도 구축 등 기반 시설에 GJC와 강원도가 투자한 직간접 분담액은 약 7380억원. 이를 감안하면 GJC의 수익 환수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지난 6월 김 지사 취임 후 GJC 측은 “보유한 자산 등을 매각하면 400억원 수준의 적자 내로 막을 수 있다”고 보고했지만, 김 지사는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강원도 측은 “기반시설공사와 유적공원·박물관 건립 추진에 따른 사업비가 계속 들어가기 때문에 GJC의 적자가 누적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GJC는 중도 기반 공사에 참여한 동부건설과 하도급 업체에 공사 대금 135억원도 지급하지 않은 상태다. 강원도 측은 “지난달 11일이 대금 만기일이었는데 GJC의 계좌 잔액이 6억원 정도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검토 결과 회생절차를 거쳐 자금력과 경쟁력이 있는 기업에 인수돼 수익성 있는 기업으로 재탄생하는 방향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관계자 및 전문가들은 “이는 최문순 전 지사가 무리하게 레고랜드를 유치하면서 수익 구조가 악화됐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레고랜드는 2011년부터 추진됐지만 사업 초기부터 자금 조달이 되지 않은 데다 부지 개발 과정에서 청동기와 삼국 시대 유물이 수천 점 발굴되면서 사업 진척이 더뎌졌다.
결국 2018년 멀린엔터테인먼트가 사업비 5270억원 중 4470억원을 직접 투자하는 대신 수익 배분은 강원도가 적게 받는 식으로 사업이 조정됐고, 멀린 측 요구로 강원도도 추가로 채무를 내 투자를 해야 했다. 이런 난항이 벌어지는 동안 춘천시와 강원도의회, 시민사회 등에서는 “졸속 계약을 할 거면 사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지만 최 전 지사가 이를 무시하고 사업을 밀어붙인 셈이다.
강원도가 도 예산으로 2050억원을 갚는다고 하더라도 중장기적으로 채무를 갚아나갈만한 재정적 체력이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올해 기준 강원도 재정자립도는 24.7%로 17개 광역시·도 중 15위다. 한 전문가는 “지방정부가 디폴트 됐을 때 중앙정부가 빚을 갚아 줄 의무는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승민 전 의원은 레고랜드 사태에 대해 “지자체 파산에 대해 그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규정해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레고랜드 사태는 수익성과 경제성은 따지지 않고 치적 쌓기에 급급했던 최문순 전 지사의 무리한 사업 추진과, 채권 시장에 대한 이해 없이 전임자의 과오를 성급하게 해결하려던 김진태 지사의 행보가 맞물린 결과”라고 정리했다. 한 전문가는 “결국 지자체장의 포퓰리즘 정치가 맞물려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며 “전국 각지에 전시성으로 난립하는 테마파크에서도 비슷한 문제들이 많은 만큼 대대적인 감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준용 주말뉴스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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