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 상황 눈에 아른” 또래 잃은 20대 위로·격려 필요

윤혜인 2022. 11. 5.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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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심리적 불안감 확산
지난 3일 서강대학교 이태원 참사 추모공간에 학생들이 작성한 글귀가 부착돼 있다. [뉴스1]
“아스팔트 도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심폐소생술(CPR)을 받고 있는 상황이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이태원 참사 목격자 문경훈(18)씨에게 지난 29일은 악몽과도 같았다. 경찰과 구급차가 출동할 때만해도 ‘몇 명이 다쳤나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그날 밤 이태원역 일대에는 영화에서나 볼법한 응급상황이 펼쳐졌다. 모포로 덮여있는 희생자 중에는 사고 발생 전 거리에서 대화를 나눈 청년도 있었다. 문씨는 “어안이 벙벙하면서 충격적이었고 무서웠다”며 “일단 벗어나자는 생각으로 도망치다시피 빠져나왔지만 죄책감도 들고, 악몽을 꿀 정도로 많이 힘들다”고 말했다.

이태원 참사로 심리적 불안 호소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우울, 불면, 소화불량, 기억력 감소, 반복적인 사건 회상, 유사 상황 회피, 무기력 등을 겪는다. 모두 트라우마를 경험한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스트레스 반응이다. 트라우마는 생명을 위협하는 정도의 스트레스 또는 폭력이 동반된 사건을 의미한다. 전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준 이번 이태원 참사 역시 누군가에겐 트라우마로 남았다. 참사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과 경찰, 구급대원 등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미국 9·11테러 목격자 20% PTSD 경험

지난 31일 오후 7시 이태원역 인근에 조성된 추모공간에 시민들이 놓아둔 꽃이 쌓여있다. 윤혜인 기자
트라우마로 인한 스트레스 반응은 대부분 특별한 치료 없이 자연적으로 좋아진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이런 증상이 한 달 이상 지속돼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경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진단받을 수 있다. 백명재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총무위원장)는 “여러 연구를 종합해 봤을 때 다치지 않은 목격자가 PTSD로 진단 받는 사례는 10% 미만”이라면서도 “다만 이번 사고는 워낙 끔찍했기 때문에 다른 사고보다 진단율이 높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우려는 기우가 아니다. 2005년 미국을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1000명 이상의 사망자와 5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에 따르면 카트리나 발생 이후 7~19개월 동안 피해를 입은 지역의 거주자 중 PTSD 추정 이력을 가진 이는 17.1%에 달했다. 발생 이후 24~27개월에는 이 비율이 29.2%로 증가했다. 뉴욕시에 따르면 2001년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9·11테러 이후 5~6년간 사고를 목격하거나 부상을 입은 이들 중 20%가 PTSD를 경험했다. PTSD는 비단 일상생활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심할 경우 자살로 이어질 수 있어 더욱 주의가 요구된다. 미국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중 상당수도 전쟁으로 인한 PTSD를 겪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둠이 짙어져도 추모의 발길은 이어졌다. 지난 3일 새벽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태원역을 찾은 시민들은 꽃과 음식, 메모지 등을 남기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최영재 기자
현재 가장 우려되는 대상은 현장 상황을 목격한 목격자 및 갑작스레 가족을 잃은 유가족이다. 직업적으로 죽음을 접할 일이 많은 소방대원, 경찰관, 의료진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사고는 이들이 이전에 경험한 죽음과 양상이 달랐다. 고령자나 질환자가 아닌 건강한 젊은이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사망했다. 백 교수는 “이번 상황이 너무나 대규모였고, 인파가 몰려 현장에서 구조나 이송이 원활하지 않아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었던 데다, 사망자 중 젊은 분들이 많아 무력감과 좌절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며 “현장을 수습하신 분들에게 가해진 충격이 다른 사건에 비해 훨씬 더 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사고를 간접적으로 접한 일반 시민들도 스트레스 반응을 겪을 수 있다. 지난 31일 이태원역 추모공간에는 “기분 나쁜 무력감과 대상 없는 죄책감에 이곳을 찾았다”, “일상을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진다”는 등의 글이 눈에 띄었다. 이태원역 인근 카페 운영자 이모(30)씨는 “손님 중 돌아가신 분들이 있을까 걱정되고, 사고 영상이 계속 떠오른다”고 말했다. 현재 의학 기준에 의하면 영상만으로 사고를 접한 사례는 PTSD 진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인에게도 스트레스 반응이 지속될 수 있다. 권준수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시간이 지나도 반복적으로 사고가 생각나고, 쉽게 놀라거나 화가 나는 등의 증상이 지속되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20대의 정신건강을 챙겨야 한다. 지금의 20대는 8년전 세월호에 이어 이번 이태원 참사까지 동년배들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대규모 참사를 연달아 겪었다. 현재 만 25살인 1997년생의 경우 2014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월호 사고를 목격했고, 이번 이태원 참사로 또 다시 동년배 100여명의 죽음을 경험했다. 대학생 김석연(25)씨는 “이번 사고로 친구의 지인이 세상을 떠나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며 “앞으로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사고 계속 떠오르면 전문가 도움 받아야

지난 3일 새벽 이태원역 추모공간에 고인을 위로하는 마음을 담은 ‘빨대꽂힌 우유’가 놓여있다. 최영재 기자
백명재 교수는 “20대 중 세상이 생각했던 것 보다 안전하지 않다며 우리 사회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거나,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지 않은 것에 대한 무력감과 자괴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을 수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20대는 코로나19 이후 정신건강이 가장 안 좋아진 세대인데다 고립될 가능성이 큰 1인 가구도 많다. 이들의 정신건강에 더욱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심민영 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장도 지난 1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20대는) 같은 연령대의 친구들이 참사를 당하는 모습을 반복해 보게 된 세대”라며 “이런 사고가 누적됨으로써 세상을 너무 위험하게 본다든가, 굉장히 무력해질까봐 우려된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현재 마음을 다친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건 서로를 향한 위로와 격려라고 강조했다. 내가 고립된 존재가 아닌 누군가와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느낄 때 비로소 회복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고 따뜻한 격려의 말을 건넬 필요가 있다. 권 교수는 “아픔을 공감해주는 게 충격을 받은 분들이 빨리 회복하는데 도움이 된다”며 “피해자와 목격자를 향한 날선 댓글이 객관적으로 사실일 수는 있지만 그런 비판보다는 사고로 인한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게 먼저”라고 말했다.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 학회도 지난 30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비판하지 말고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지지와 위로”라고 밝혔다. 이는 20대가 충격을 벗어나는데도 유의미한 방법이다. 백 교수는 “20대 1인 가구는 주말에 약속이나 모임을 만들어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을 줄이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혜인 기자 yun.hy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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