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 약탈에 목맨 만철, 조선·중국인 노동자 이간책 써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0〉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다롄항의 만철 전용부두. 매년 3500척의 선박이 650만t의 화물을 토하고 삼켰다. [사진 김명호]](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211/05/joongangsunday/20221105002126340zzws.jpg)
다롄 부두서 숨진 노동자 6개월간 3520명
1931년 6월 만철 이사장이 교통운수 연석회의에서 비상시기 교통계획을 공언했다. 3개월 후 관동군의 요구에 복종하기 위해 총 동원령을 내렸다. 9월 18일 밤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신속한 병력 이동은 물론 장갑열차를 동원해 관동군의 동북점령 시간을 단축시켰다. 만철 무장자위대의 관동군 숙영(宿營)지 확보와 의료시설 지원, 부상병 위문 등 후방 지원도 도맡았다. 당시 만철 직원은 약 3만9000명 정도였다. 사변 후 일본인직원 1만5884명과 외국인 직원 6370명이 표창을 받았다. 그 중 일본인 244명은 만철을 떠났다. 만주국 요직을 차지했다.
만철은 철도회사였지만 조사부, 농업시험장, 중앙시험소, 지질조사부 등 부설기관이 많았다. 계열사도 석탄, 제철, 호텔, 병원, 언론기관, 영화제작소 등 없는 것이 없었다. 만주의과대학을 위시한 교육기관도 70개가 넘었다.
1907년 러시아로부터 이양 받은 만철의 철도주변 부속지 면적은 150㎢였다. 만주사변 시기에는 843㎢로 늘어났다. 당시 일본은 경공업 국가였다. 만주에 경공업을 육성할 경우 일본은 만주국의 상대가 못됐다. 만주에 중공업 육성을 추진했다. 만철은 만주국 전역의 철로 수축과 광산채굴, 토지 임대, 삼림 채벌권 외에 강철, 전기, 석유, 화학공업 육성에 광분했다. 계열사 80여개를 설립해 자원 약탈에 목을 맸다. 푸쑨(撫順) 탄광의 경우 1일 생산량은 6000t 내외였다. 1939년 2만t으로 늘어났다. 만철은 매년 100만t을 소모했다. 나머지는 다롄(大連)항을 통해 일본과 동남아 지역으로 반출했다.
![만철 교향악단은 유럽의 유명 연주가 영입에 거금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 김명호]](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211/05/joongangsunday/20221105002127729lfsi.jpg)
만철에는 조선인 직원이 2000명 정도 있었다. 형이 퉁화(通化)의 만철 지사에 근무했던 조선족 경제학자의 회고를 소개한다. “형은 업무상 일본인과 왕래가 빈번했다. 일요일이나 휴일엔 일본인 가정이나 우리 집에서 마작을 하곤 했다. 하루는 우리 집에서 마작이 벌어졌다. 야반이 되자 형이 불렀다. ‘선생 댁에 가서 부인에게 먼저 쉬시라고 전해라.’ 형이 선생이라 부르던 일본인은 나이가 제일 많았다. 서로 존칭을 썼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왔다. 가로등과 집집마다 전등이 있었다. 형 친구가 사는 만철 숙소에 가서 일본 부인이 촛불 앞에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게 사탕까지 선물로 주며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일본이 패망하자 마을에 있던 일본인들은 자취를 감췄다. 내가 심부름 갔던 만철 직원은 부인과 함께 와서 작별인사를 잊지 않았다. 겸손과 절약과 예의가 몸에 밴 일본인들이 중국에만 오면 난폭해지는 이유가 아직도 궁금하다.”
만철 인재 육성·경영 방식 등 배울 점도
만철은 특수회사였다. 일본 식민통치의 도구에 불과했지만 다면성이 있었다. 인재배양, 경영방식, 회사조직에 배울 점이 많았다. 만철조사부는 사상이나 전력을 문제삼지 않았다. 인재라면 무조건 기용했다. 일본 내지에서 범죄자 취급 받던 마르크스주의자의 유일한 피난처가 만철조사부였다. ‘만철 마르크스주의’라는 풍자성 용어가 생길 정도였다.
당시 일본은 남녀차별이 심했다. 여자가 할 일은 밥, 청소, 빨래, 남편 시중이 다였다. 화류계 출입 밥 먹듯 하는, 시궁창 같은 남편 만난 덕에 고약한 병 걸려도 말 한마디 못했다. 만철은 재능만 있으면 학력이나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일본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 구술을 남겼다. “종전 후에도 대학 졸업자가 아니면 영화 촬영기사가 불가능했다. 감독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만철 계열사나 다름없는 만주영화공사(만영)는 달랐다. 내 능력을 원없이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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