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사람에게도 '떨켜'가 있다면
일단 말하고 생각하기
말을 뒤집으면 통찰이 깃들기도
나무는 떨켜로 잎과 이별 준비
사람 잃는 일엔 왜 그런 게 없을까
애도라 쓰고 떨켜라 읽는다
이소연 시인
잎이 떨어진다. 바람이 눈에 보인다는 감각에 홀리기 좋은 가을이다. 이문재 시인은 ‘시월’이란 시에서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고 노래했다. 보이지 않는 중력이라고 해놓고 자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도록 하는 시인의 문장들이 툭, 툭 심장 위에 내려앉는다. 그러고는 노랗게 타오르는 건너편 은행나무를 넋을 놓고 보게 한다. 한 그루 나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잎이 한꺼번에 떨어져 내린다.
저렇게 많이 떨어지면 아프지 않을까? 잎을 다 떨구고 나면 몸살을 앓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참을 보다 보니 저 나뭇잎은 넙치 같고 이 나뭇잎은 누군가 벗어놓은 양말 같다. 나는 하릴없이 낙엽마다 아빠 허리에 붙었다가 떨어진 파스 같네, 감은 눈 같네, 달걀 껍데기 같네, 닮은 꼴을 찾아주다가 며칠 전 술자리 생각이 났다.
“시인이 생각하는 법이 궁금해요”라는 말 때문이다. 서울 서대문역 근처 식당에서 소주에 돌솥밥을 먹는 내내 생각했다. ‘나 어떻게 생각하지?’ 그러고 보니, 내가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생각 좀 하고 말해”다. 과연, 생각이 말보다 언제나 먼저일까? 의도도 없고 목적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말을 시시콜콜하게 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아는가. 생각은 거듭될수록 중요도를 따지고 의도와 목적을 찾으려 한다. 그런데 의도는 불순하기 쉽고 목적은 맹목적이기 쉽고 중요한 것은 작은 것들을 놓치기 쉽다. 그러니 생각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볼까 한다. “일단 말하고 생각해.”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말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헤아리고 살피는 말하기가 필요한 만큼 생각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말하기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시인은 쓸데없이 말을 뒤집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생각 좀 하고 말하라는 게 사실 뒤집을 만한 말은 아닌데, 일단 뒤집어봤다. 그랬더니 뒤집히는 게 신기하다. 말이 안 될 것 같았는데 말이 된다. 말을 먼저 하다 보면 어떤 말에는 삶에 대한 통찰이 깃들기도 한다. 생각을 먼저 하지 않아도 생각이 내려앉은 자리가 선명하다.
나무는 가을쯤 ‘떨켜’란 세포층을 만든다고 한다. 잎자루와 가지가 붙는 곳에 물관을 막아 잎을 떨어뜨릴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무도 이렇게 한 계절을 떠나보내기 위해 노력을 한다는 게 신기하다. 어쩌면 공들인 생각을 생각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도 ‘떨켜’ 같은 말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한 편의 시를 완성하려고 밤새도록 너무 많은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 생각 없는 말이 앉았다간 자리가 없었다면 끝내 쓰지 못했을 문장이 있다.
나무가 이별하는 방법이나 생각이 생각을 떠나보내는 일이나 아름답기 그지없다. ‘떨켜’ 있는 것들을 찾아 놓고 보니 문득 부끄러워진다. 느닷없고 대책 없고 황당한 지난 연애들이 떠올라서다. 나는 죽도록 사랑하다가도 예고 없이 헤어졌다. 홧김에 헤어지고, 전화 안 받아서 헤어지고, 문자 봤다고 헤어지고, 몰래 담배 피웠다고 헤어지고, 내가 준 꽃다발을 행사장에 놓고 왔다고 헤어지고, 휴대폰 비밀번호를 안 가르쳐줘서 헤어졌다. 떠올리면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한 사람에 대한 탐구심으로 타올랐던 시간은 한순간에 고꾸라졌다. 온몸으로 이별을 준비하는 나무까진 아니어도 한 사람에 대한 존중을 담아 최선을 다해 마음을 전하고 충분히 기다려준 뒤에 헤어질 순 없었을까? 그게 다 내가 성숙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시인은 반성하기 위해 태어나는 거라고 우겨본다. 그리고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반성하는 사람으로 살아야지 다짐한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의 일이다. 차가 없던 시절, 전주역에 내려서 시댁인 진안까지 택시를 타고 가곤 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하실 분이 서운할 정도로 남편을 나무랐다. 돈 아껴 쓰라며, 돈을 길에 버리고 다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그것이 정을 떼려고 하는 ‘떨켜’였을까? 남편은 그날 밤 내내 잠을 설쳤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남편은 시 한 편 쓰지 못하고 큰 상실감에 빠져들었다. 사람이 사람을 잃는 일에는 왜 ‘떨켜’라는 세포가 없을까? 나뭇잎 수만 개를 한 번에 잃을 준비를 하는 나무의 일과 단 한 사람 잃을 준비도 못 하는 사람의 일에 대해 생각한다.
시월의 마지막 날, 이태원 참사가 있었다. 나는 모든 일을 멈추고 낮달같이 몸져누웠다. 이 참담 앞에서는 슬픔이 견딜 수 있는 것이라는 게 이상하다. 애도라고 쓰고 떨켜라고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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