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 횡포에 수 만명 희생, 슬픈 역사 공유한 제주·대만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8〉 제주4·3과 대만2·28
2·28전시관을 둘러보고 마지막에 찾아간 제주4·3 특별전시관은 ‘아름답고 슬픈 섬’(島嶼的美麗與悲傷)이란 짧고도 강렬한 어구로 시작했다. 답사여행을 준비하면서 대만 친구에게 추천받아 읽었던 책 『대만 아름다운 섬 슬픈 역사』(주완요 지음)와 같은 제목이었다.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 기마경찰에 의해 한 아이가 다친 사고로, 2·28사건은 같은 해 2월 27일 전매국 단속원이 노점상 여성을 폭행한 사건으로 시작됐다. 제주에선 2만5000명에서 3만 명이, 대만에서는 2만8000명이 죽었다. 서로 다른 두 섬에서 너무 유사한 일이 평행선 같은 역사를 그렸다.
사건 40여년 지나서야 진상 드러나
식량 제주도는 식량이 부족했다. 1946년에는 보리마저 흉작이었다. 그 위에 미군정은 미곡수집령까지 내려졌다. 공출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던 일제강점기가 되살아난 듯했다. 대만도 태평양 전쟁 동안 이미 식량 생산이 대폭 줄어 있었다. 중화민국은 대만에 전매국과 무역국을 설치해 경제를 독점했다. 장뇌·성냥·담배·술·도량형 등을 전매로 묶었고, 대만 전역의 운수를 통제하며 무역과 공업을 정부가 독점하고는 민간인들을 가혹하게 단속했다. 해방 이후 1년여 만에 물가가 100배나 올랐다.
귀향 제주도에는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을 포함해 6만여 청장년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만에도 일본군에 끌려갔던 젊은이 10만여 명 돌아왔다. 두 섬 모두 쌀독은 비어 있었고 일자리도 없었다.
촉발 1947년 3.1절 기념식과 시위가 이어지는 와중에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이가 밟혔다. 구경꾼들이 항의하며 쫓아가다가 느닷없는 총성에 쓰러졌다. 국민학교 6학년 어린이를 포함해 여섯 명이, 그것도 등에 총을 맞아 죽었다. 제주의 3.1사건 이틀 전, 대만 전매국 단속원이 여성 노점상 한 사람을 폭행했다. 구경꾼들이 항의하자 총을 쏴 한 사람이 죽었다. 제주도나 대만이나 인명 사건을 해결하라고 시위를 하면서 그동안 쌓인 분노가 불붙었다. 섬 전체로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갔다.
고문 1948년 3월 조천지서와 모슬포지서에 끌려갔던 두 청년이 고문사를 당했다. 한림에서는 초주검이 되어 끌려가던 청년이 총살을 당하는 사건도 터졌다. 세 곳에서 주민과 학생들이 장례를 치르고 분노의 시위를 벌였다. 미군정이 사건을 감찰했지만 유해진 제주지사는 유임됐다. 1948년 5·10 남한 단독선거를 밀고 가던 미군정은 유해진이 필요했을 것이다.
봉기 남로당은 탄압이 강해질수록 강경하게 저항했다. 결국 1948년 4월 3일, 350여 명의 남로당 무장대가 봉기를 일으켰다. 경찰서와 우익인사들을 공격해 경찰관 넷과 민간인 여덟 명, 무장대 둘이 사망했다. 미군정과 국방경비대와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대대적으로 진압에 나섰다.
협상 제주의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중령)은 미군정의 실정이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4월 28일 무장대와 전투중지를 합의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협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5월 1일 우익 청년들이 오라리 마을을 불 지르자 이를 무장대들의 소행이라고 발표하고는 강경토벌에 나섰다. 김익렬은 해임됐다. 대만 행정장관은 2·28사건 직후 사건처리위원회와 수습을 논의하기는 했다. 유화 제스처로 시간을 끌면서 뒤로는 장제스에게 진압군 파병을 긴급 요청했다.
타이베이 기념관에 제주4·3 조형물
학살 제주는 1948년 11월부터 4개월간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을 초토화했다.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원동리·세화리·토산리·다랑쉬굴, 조천면의 자수자, 의귀국민학교 수용 주민, 북촌·동광리·상창리·봉개지구 육해공 합동작전... 지명 하나에 적게는 50여 명이, 많게는 수백 명씩 죽어 나갔다. 사형이 집행된 것도 수백 명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8월에 제주시·서귀포·모슬포 등지에서는 예비검속자 주민이 수백 명씩 학살당했다. 대만에서는 2개 사단이 상륙하고 5월 16일까지 두 달 동안 대만 전역을 휩쓸었다. 진압이란 이름의 생지옥이었다.
방언 제주도 지방어는 외지인들에게 낯설었다. 중국의 지방어는 말로는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식민지 50년 동안 대만은 대륙과 접촉이 없었으니 대만 말은 외국어와 다를 바 없었다. 제주도 토벌대나 대만 진압군의 말을 즉시 알아듣지 못해 죽은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밀항 제주 사람들은 학살의 광풍이 멈추지 않자 제주도에서 탈출했다. 밀항도 많았다. 오사카는 제2의 제주도가 되었다. 대만은 2·28사건 이후에 많은 사람이 말없이 이민을 했다. 그것은 생존이고 도피였고 추방이었다.
침묵 대만이나 제주도나 무참하게 죽은 사람들은 원혼으로 떠돌았고 가족들은 연좌의 사슬에 묶여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현기영이 1979년 소설 『순이삼촌』으로 4·3을 건드리자 그의 손톱은 고문에 짓이겨졌다. 40년 동안 완벽하고도 절대적인 침묵을 강요당했다. 계엄령 치하의 대만도 그랬다. 대만의 역사를 배울 수도 없었다.
해금 1987년 4·3과 2·28은 비로소 해금됐다. 대한민국은 민주화를 이뤘고 대만은 계엄령을 해제했다. 두 학살 사건은 어렵사리 공론화 과정을 거쳐 진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과 두 나라 국가원수는 자국의 국가폭력을 국민에게 머리 숙여 사죄했다. 지금은 기념관과 유적지 등을 통해 참극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대만2·28과 제주4·3은 쌍둥이였다. 망망대해 3000㎞ 떨어진 두 섬의 비극은 어찌 그리 똑같았을까. 너무도 아름다운 풍광 속에 깊고 깊은 슬픔을 품고 있는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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