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철·킥라니·무단횡단…“괜찮겠지” 안전 위협 행위 판쳐

오유진 2022. 11. 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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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심각한 안전불감증
안전 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채 킥보드를 이용하는 시민. [뉴시스]
출퇴근 시 왕복 1시간가량 지하철을 이용하는 직장인 이민희(29)씨는 이태원 참사를 지켜보며 평소 이용하는 지하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밀고 들어오거나, 이미 만원인 열차에 어떻게든 비집고 타려는 사람을 매일 본다”며 “스크린도어에 옷이나 가방 등이 끼인 채로 문이 닫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언젠가 사고가 날 것 같아 두렵다”고 말했다.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7호선 에스컬레이터가 길어 무섭다는 생각에 손잡이를 꼭 잡고 타는데, 뛰어 다니는 사람 때문에 도미노처럼 넘어질 뻔한 적이 있다”며 “에스컬레이터 탑승 시 걷거나 뛰어선 안 된다는 안내가 수없이 나오지만, 사람들은 그저 백색소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서울교통공사가 2017년 1월~2021년 9월 발생한 에스컬레이터 넘어짐 사고를 집계한 결과 치료비가 지급된 경우만 총 257건이다. 매달 4~5명이 치료를 받을 정도로 다치는 사고가 난다는 뜻이다.

작년 서울시민 93% “안전불감증 심각”

안전을 위해 물러나라는 안내가 나오지만 발 디딜 틈 없이 혼잡한 1호선 서울역 플랫폼. [연합뉴스]
‘도로 위 무법자’로 불리는 전동 킥보드도 대표적인 안전수칙 위반 사례로 꼽힌다. 마치 고라니처럼 도로 위에 갑자기 튀어나와 운전자와 보행자를 위협한다는 데서 ‘킥라니’라는 별명까지 생겼을 정도다. 홍기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청에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5월부터 올해 7월까지 서울에서만 약 4만5000건의 규정 위반 탑승자가 적발됐다. 적발된 건수 중 약 80%가 안전모 미착용, 승차정원 위반이었다. 소방청 자료에 따르면 올해 7월까지 약 3500명이 전동킥보드 사고로 구급차에 이송됐다. 국회에 2년 째 계류 중인 ‘전동킥보드법’을 대표 발의한 홍 의원은 “전동킥보드 이용수요는 늘어나는 반면 체계적인 관리 제도는 마련되어 있지 않아 사고가 급증하고 있다”며 “운행방법을 규정해 보다 안전한 사회를 위한 신속한 법 통과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라며 무작정 도로에 뛰어드는 무단횡단도 고질적인 안전불감 사례다. 무단횡단은 단속 시 2만원의 범칙금을 부과하는 ‘불법’이지만 시민 대다수는 이를 불법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군중심리에 이끌려 무단횡단하는 경우가 많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발생한 무단횡단사고는 총 5896건으로, 5730명이 상처를 입고 271명은 목숨을 잃었다. 언제 어디서든 행인이 등장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무작정 질주하는 운전자들도 문제다. 지난 7월 개정된 도로교통법상 차량 운전자는 교차로에서 우회전할 때 보행자가 있다면 보행 신호와 상관없이 무조건 일시 정지해야 한다. 횡단보도에서 건너는 사람은 물론 건너려는 시도만 해도 반드시 멈춰 보행자를 보호하자는 게 입법 취지다. 경찰청에 따르면 법 개정 이후 3개월간 우회전 교통사고는 3386건으로 전년동기 대비 24.4% 줄었다. 보행자 우선이라는 기본만 지켜도 사고를 줄일 수 있는 셈이다.

뼈아픈 이태원 참사는 그간 소홀했던 생활 속 안전사고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지하철, 도로 위 등 시내 곳곳에서 보이는 시민들의 사소한 안전수칙 위반 행위는 자칫하면 큰 사고로 번질 수 있는 위험요소다. 지난해 서울시 설문조사에 따르면 시민 93%가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응답자들은 ‘이 정도면 충분히 안전하다’고 여기는 적당주의(58.1%)와 물질 만능 풍조(17.1%) 등이 안전불감증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조현정(31)씨는 “편리함과 안전이라는 가치가 충돌하면 편리함을 택하는 사람이 많다”며 “공공장소에서도 자신만 먼저, 빠르게 가려는 이기적인 태도가 안전 사고를 초래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이랑 kim.yirang@joins.com
이태원 참사 당일 현장을 방문했던 김모(23)씨는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빠져나왔다”며 “평소 꽉 막힌 거리나 열차를 이용하는 일이 습관이 되어 큰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각) CNN에 출연한 재난 관리 전문가인 줄리엣 카이엠은 “서울 시민들은 붐비는 공간에 익숙해져 있어 인파로 가득 찬 거리에서도 위험성을 완전히 인지하지 못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쟁, 코로나19 등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강도 높은 위험은 일상의 작은 사고에 무뎌지는 안전불감증을 키웠다. 태어날 때부터 미사일 도발, 포격 사건을 마주하며 살았기에 사회 곳곳에 도사리는 작은 위험을 당연시하는 ‘비일상의 일상화’가 된 것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전쟁, 북한 도발 등의 위협이 만연하다 보니 국민들이 낙관적 편향에 빠져 있는 상태”라며 “매 순간 전쟁 같은 큰 위협에 시달리면 일상을 지속할 수 없다 보니 본능적으로 이를 무시하고, 그 결과 우리 사회가 안전하다는 지나친 믿음이 형성된 것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곽 교수는 “문제는 이 믿음이 한 번에 무너져내리면 국민 전체가 집단 불안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라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후속 조치를 해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울산의 한 교차로에서 우회전 차량이 횡단보도 위에 멈춰 있다. [뉴스1]
안전불감증은 결국 대가를 받아간다. 큰 사고가 날 때마다 1931년 미국의 보험회사 직원인 허버트 하인리히가 산업재해 요인을 분석해 내놓은 ‘하인리히의 법칙’이 등장한다. 1명의 사망자가 나온 사고의 경우 그 전에 같은 이유로 부상자 29명이 나왔고, 잠재적 피해자들이 300명에 달했다고 해서 ‘1:29:300 법칙’이라고도 한다. 통계적으로 150명이 넘는 피해자가 나온 이태원 참사 이전에 거리와 지하철에서 붐비는 인파에 밀려 4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고, 4만5000명이 사고를 가까스레 면했다는 얘기다. 곽 교수는 “대형 사고 이전에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부주의로 인한 수차례의 전조가 있었을 것”이라며 “시민들이 이 참사를 꼭 기억하고 일상에서의 위험을 발견했을 때 가벼이 넘기지 않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전했다.

특히 수많은 시민이 몰리는 출퇴근 시간대 지하철역이 안전 대책 마련이 시급한 곳이다. 서울시는 2일 하루 승하차 인원이 10만명 이상인 사당역, 고속터미널역, 신도림역 등 혼잡도가 심각한 지하철역에 대한 현장 분석에 나선다고 밝혔다. 환승객을 더하면 이용객이 30만명에 달하는 신도림역의 경우 출퇴근 시간에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바닥에 발을 대지 않고도 이동할 수 있을 지경이다. 언제 안전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다. 서울시는 승객 동선 개선, 안전시설 보강, 대피공간 확보, 모니터링 CCTV 설치, 안전요원 상시배치 등을 검토하고 있다. 이정술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안실련) 사무총장은 “급속도로 압축 성장한 우리 사회는 안전 측면에서는 여전히 후진국 수준”이라며 “안전한 사회를 위해서는 결국 민관이 힘을 합쳐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총장은 “시민들 또한 ‘별일 있겠어’라고 넘어가기보다는 안전사고 예방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학교서 심폐소생술 등 안전교육 소홀

소홀히 다뤘던 학교 현장에서의 안전교육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교육부는 세월호 참사 이후 학교 교과과정에 ‘생존 수영’ 등이 포함된 안전교육 표준안을 만들고, 초등학교 1, 2학년을 대상으로 ‘안전한 생활’ 과목을 가르치도록 했다. 하지만 실제 교육현장에서는 비중 있게 다루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4년 도입될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형식으로나마 유지됐던 이 과목조차 사라질 예정이다. 우옥영 보건교육포럼 이사장은 “입시 위주의 교육에만 몰입하다 보니 생명과 직결된 안전감수성을 기르는 일에는 뒤처져 있다”며 “그동안 국민 전체의 안전감수성이 소홀했다는 것이 이번 참사로 여실히 드러난 셈”이라고 지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이라면 누구나 심폐소생술(CPR)과 응급처치 요령을 배우지만 실제상황에서는 활용도가 낮다는 점도 되짚어봐야 할 문제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전국 고등학교 99% 이상이 CPR을 비롯한 응급처치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2020년 통계청 조사에서는 긴급상황 시 인공호흡·심폐소생술 방법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답한 시민은 22.6%에 불과했다. 우 이사장은 “응급처치 기술을 일시적으로 가르칠 것이 아니라, 응급상황이 닥쳤을 때 119 신고, 부상자 처치 등을 어떻게 분담하는지 체계적인 교육을 진행해야 한다”며 “CPR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안전망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교육이 필요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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