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더 어렵다” 돈 가뭄 건설사, 9만 가구 밀어내기 분양
연말 아파트 분양 봇물 왜
부동산 정보업체인 부동산R114에 따르면 이달 분양 예정인 아파트만 전국 89곳에 총 6만1312가구에 이른다. 2015년 이후 동월 대비 가장 많은 물량이다. 지난해 11월 3만413가구가 나왔던 것에 비하면 2배 이상 많다. 12월 분양 물량 2만7364가구를 더하면 9만 가구에 이르는 물량이 연말에 쏟아지는 셈이다. 서울에서는 성북구 장위동 장위자이 레디언트(2840가구 중 일반분양 1330가구) 등 재개발·재건축 단지에서 연말 8900여 가구가 나온다. 경기도에서는 화성·부천·광주시 등지에서 3만 가구가 분양한다. 지방에는 충남(1만608가구), 대전(4643가구), 경남(3312가구) 등지에서 분양 물량이 집중돼 있다. 임병철 부동산R114 리서치팀 팀장은 “부동산 경기 침체로 건설사들이 분양 일정을 미루던 것이 누적돼 연말에 집중된 것”이라고 말했다.
줄줄이 계약 포기, 무순위 청약 속출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분양 물량은 급증세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9월 말 전국 미분양 주택은 4만1604가구로 전월 3만2722가구 대비 27.1% 증가했다. 한 달 새 약 1만 가구가 증가한 셈이다. 수도권은 7813가구로 전월 대비 55.9% 증가했고, 지방은 3만3791가구로 같은 기간 21.9% 늘었다. 최근엔 경기 안성시와 양주시가 미분양 관리지역으로 지정됐다. 두 지역은 9월 조정대상지역에서 해제됐지만, 침체된 시장 분위기에 분양시장이 살아나지 못하면서 이달 말까지 주택도시보증공사(HUG)로부터 미분양 관리를 받게 됐다. 박원갑 KB부동산 수석연구위원은 “2008년 말에는 미분양 주택 수가 16만 가구를 넘었다고 하지만 그때는 분양가가 사실상 자율화됐을 때”라며 “지금처럼 정부가 분양가를 통제하면 분양가가 싸기 때문에 가장 먼저 팔리는데 그렇지 않다. 과거와 수평비교를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건설사들이 아파트 분양에 나서려는 건 사업을 더는 미루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수천억원에 이르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 이자가 계속 쌓이고 있는 데다 최근 금융시장 경색으로 PF 대환 대출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박원갑 연구위원은 “부동산 경기가 더 악화되기 전에 (어려운 상황에서라도) 분양해 유동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PF나 브릿지론(사업인가 전 대출) 등 사업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다 막히면서 더는 미룰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부동산 경기가 올해보다 더 좋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영향을 미쳤다. 우병탁 신한은행 WM 컨설팅센터 부동산팀장은 “올해 상황이 2019년 초반과 같이 경기가 하락하다 하반기 반등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분양을 미뤘던 곳도 있었다”며 “하지만 내년에도 경기가 나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자 올해 안에 분양을 시작하겠다는 곳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김현 한국기업평가 책임연구원은 “원자재나 인건비 상승세가 꺾이지 않고 있어 사업 환경이 악화한 것도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건설사들의 분양 엑소더스에 미분양 급증으로 건설사들이 벼랑 끝에 몰리면서 금융시장 전반으로 위기가 확산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실제 최근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건설사 5~6곳의 부도설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미분양이 생기면 건설사는 공사비를 제때 받기 어려워지면서 자금경색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최근 충남지역 도급순위 6위 건설사인 우석건설도 미분양에 발목이 잡혔다. 특히 최근 부도설에 휘말린 건설사 가운데 절반이 대형 건설사다. 1000가구가 넘는 대단지 아파트는 통상 건설사가 지급보증을 서는 PF 규모만 수천억원에 달하기 때문에 미분양으로 사업이 굴러가지 않으면 대형 건설사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2013년 두산건설도 고양 일산신도시에 분양한 2700가구짜리 두산위브더제니스 아파트가 대거 미분양되면서 건설은 물론 두산그룹 전반이 자금경색에 시달리기도 했다.
문제는 건설사들의 자금경색이 건설업계에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동안 PF 대출을 집중적으로 늘려 온 증권사나 저축은행으로 불똥이 튈 수 있다. 중소형 증권사는 위험도는 높지만 고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브릿지론이나 중·후순위 부동산 PF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증권사의 PF 대출 잔액은 3조3000억원으로 중소 규모 사업장 중심으로 늘었고, 고위험지역에 대한 PF 비중은 62%로 다른 금융기관보다 높다. 고위험지역은 2019년 이후 주택가격 상승폭이 크고 입주 물량 확대가 예정된 지역으로, PF 부실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으로 꼽힌다.
PF 단기 자금 87% 내년 1분기 만기
증권사의 PF 관련 채무보증 규모도 최근 크게 늘었다. 올해 6월 말 기준 24조9000억원으로, 2013년(5조9000억원) 대비 4배 이상 증가했다. 이는 증권사들이 유동성 제공 외에 신용위험까지 부담하는 신용공여형 보증을 확대하면서 신용위험에도 노출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부실채권 대비 충당금을 얼마나 쌓았는지를 보여주는 고정이하여신 대비 충당금 적립률(Coverage ratio)도 97%로 금융권에서 가장 낮다. 시중은행과 보험권은 이 비율이 600%대다. 최근엔 증시 부진의 상황까지 겹치며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구조조정까지 진행 중이다. 케이프투자증권은 인원 감축에 나섰고, 메리츠금융그룹이 메리츠자산운용 매각에 나섰다. 한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일부 자산운용사에선 인건비 감축을 위해 명예퇴직 신청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저축은행도 PF 대출의 부실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저축은행이 PF 대출한 사업장의 경우 시공을 맡은 건설사의 신용 등급이 낮은 데다 아파트가 아닌, 유동성이 낮은 일반주택·상업시설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저축은행 PF 중 비아파트 비율은 84.5%로 증권(75%), 여신전문금융회사(66.5%), 보험사(42.2%), 은행(31.3%)보다 높았다.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평가다. 특히 건설사들이 보증을 선 PF 단기 자금의 87%가 내년 1분기까지 만기가 돌아온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부 부교수는 “건설사에 물려 있는 PF가 부실화되면 증권사 등 금융권 전체 리스크로 넘어갈 수 있는데, 최근 그럴 확률이 높아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우병탁 팀장은 “건설사·시행사들은 자금이 돌지 않으면 수익이 나고 매출이 있어도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며 “건설사의 문제가 금융권으로 확대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원갑 연구위원은 “조정대상지역 등 규제지역을 서둘러 풀고 부동산 시장을 연착륙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 공공분양 아파트까지 자금난에 공사 중단, 계약자 피해 우려
「 건설업계의 자금난이 심화하면서 공사가 중단되는 아파트가 잇따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조성 중인 경기 고양지축 B1블록 공공분양 아파트가 최근 시공사의 유동성 문제로 공사가 중단됐다. 시공을 맡은 중견 건설사가 자금난을 겪으면서 공사 현장의 건자재에 가압류가 들어오고, LH가 지급한 10억원 가량의 공사대금에 압류가 걸리는 상황이 벌어지자 공사가 중단된 것이다. LH 관계자는 “해당 중견건설사에 계약을 이행할 것을 촉구하고 있고, 정상화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전국 아파트 건설 사업장 중 관리단계가 ‘관찰·주의·관리·경보’인 곳도 지난해 말 기준 80곳에 달하는 것으로 주택도시보증공사는 분석했다. 이는 전년(38곳) 대비 2배 가량 급증한 수치다. 서진형 공정주택포럼 공동대표(경인여대 MD비즈니스학과 교수)는 “올해까지 금리 인상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이같은 자금난은 내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이 잇따르는 건 부동산개발회사(시행사)나 건설사들이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때 사업을 벌여 공사를 시작했는데, 금리가 치솟고 원자재 비용까지 증가하면서 추가 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영향이다.
실제 지난달 주택사업자의 자금조달지수는 대폭 하락했다. 주택산업연구원(주산연)에 따르면 10월 자금조달지수는 40.2로, 전월(52.7) 대비 10포인트 넘게 급감했다. 올해 1월(77.6) 대비 절반 수준으로 2013년 5월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조강현 주산연 연구원은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속도가 빠른데다 부동산 경기가 가파르게 하락하면서 업체들이 자금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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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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