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파도와 돌과 모래의 맛이 켜켜이 쌓인 ‘바다의 술’

한은형 소설가 2022. 11. 5. 00: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라가불린
스코틀랜드 아일러섬에서 탄생한 위스키 ‘라가불린’./라가불린

블라인드 테스트를 그다지 믿지 않는다. 특히나 그런 걸 하는 사람이 나라면. 무명이었던 나파 밸리의 한 와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는 ‘파리의 심판’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1976년 파리에서 열린 와인 시음회에서 있었던 대사건이 일명 파리의 심판이다. 프랑스 와인이 압도적으로 고평가를 받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미국 캘리포니아의 와인이 1위를 했고, 이 사건은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 와인의 명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데, 내게는 다른 세계의 일 같다. 술의 맛이나 향기만큼은 아니어도 병 모양과 라벨, 그 술을 따라다니는 이야기도 중요해서 그렇다. 페리뇽이라는 수도사가 주조해 돔 페리뇽이 되었다는 이야기나 진흙으로 빚은 큰 독에 최소 3년 이상을 숙성시킨다는 샤오싱주, 또 바이킹이 발할라에 가서 마시는 술이라는 미드(mead)… 이런 농익은 이야기들이 죄다 증발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휘발되어 버리면 술에는 뭐가 남나? 향기가 약간?

술맛도 술맛이지만 내가 술의 맛을 둘러싼 세계의 내러티브에 열중하는 사람이라 그럴 것이다. 눈을 뜨고, 눈 말고도 뜰 수 있는 건 모두 뜨고, 술을 마시고 싶다. 아니, 눈 말고도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술을 마시고 싶다.

그래서 위스키 케이스를 버리지 못한다. 케이스에 쓰여 있는, 위스키의 향과 맛과 연원, 그리고 양조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입을 다물지 못하겠다. 특히 맛과 향에 대한 걸 테이스팅 노트라고 하는데, 향수의 테이스팅 노트 이상으로 위스키의 그것은 나를 굴복시킨다. 과일 향과 꽃향기는 기본에다 벌꿀, 커피, 토스트, 체리, 토피, 녹슨 향, 바다, 구운 고기, 흙, 바닐라, 레몬, 오렌지, 멜론, 건포도, 생선구이, 손때 묻은 밧줄 등등의 냄새에 약 냄새와 피트향까지. 이게 다 위스키의 맛과 향기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단어들이라니, 놀랍지 않나? 나는 이런 냄새를 독자적으로 맡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냄새가 난다고 하는 걸 읽고서 술을 마시면 정말 그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런데 말입니다. 블라인드 테스트는 테스트대로 흥미로울 수 있다는 것을 한 소설을 읽다가 알았다. 은희경의 단편인 ‘중국식 룰렛’. 아시다시피 러시안룰렛이란 회전식 연발권총에 하나의 총알만 장전하고, 돌아가면서 한 번씩 자기의 머리에 당기는 끔찍한 게임이다. 중국식 룰렛은 무엇인가? 살인적인 진실 게임이라고 한다. 삼합회가 나오는 <무간도>에 그런 게 나왔었나? 가물가물하다.

이 소설에는 세 종류의 위스키만을 내는 술집이 나온다. 다 싱글 몰트다. 술집 주인은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황금색 액체가 반쯤 든 유리잔 세 개를 가져온다. 손님은 직접 한 모금 마셔본 후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주인은 위스키의 숙성 연도나 상표는 말해주지 않는다. 어떤 게 12년산 스탠더드급인지 또 어떤 게 21년산 스페셜 에디션인지 하는. 어느 것을 선택하든 가격은 같다. 마시는 자의 역량이나 그날의 운에 따라 가격보다 비싼 술을 마실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같은 돈을 내고 누구는 싸고, 또 누구는 비싸게 마시게 되어 있는 술집이다.

싱글 몰트란 무엇인가. 커피로 따지자면 ‘싱글 오리진’ 같은 거다. 여러 개를 섞은 게 아니라 단일한 무엇임을 말할 때 ‘싱글’이 앞에 붙는다. 단일 증류소의 술만으로 만든 게 싱글 몰트. 이를테면, 블렌디드 위스키는 이런 싱글 몰트를 여러 개 조합해서 만든다. 발렌타인이나 로얄 살루트, 시바스 리갈, 커티삭, 제임슨, 히비키, 크라운 로얄 모두 블렌디드 위스키다.

“말 그대로 위스키가 ‘영혼(spirit)’이라고 불린다면 싱글 몰트야말로 그중에서도 가장 정제된 형태이며, 순수한 영혼은 천사뿐 아니라 악마의 것이기도 하다.”라며 이 소설에서는 싱글 몰트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만 해도 위스키에 관심이 없던 나는 위스키를 ‘스피릿’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래서 사람들이 위스키를 마시는 일에 그렇게나 야단법석을 떨며 의미를 부여하나 싶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건 단지 술이 아니라 스피릿이다.’ ‘나는 지금 영혼을 마시고 있다.’ 위스키만 해도 그런데 싱글 몰트라니, 싱글 스피릿이자 퓨어 스피릿이 되는 것이다. 순수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싱글 몰트를 마시는 일은 순수한 영혼을 마시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상당히 ‘오바’한다면. 싱글 몰트를 마신다고 해서 이 저속한 세상의 때가 씻겨 내려가는 것은 아니겠으나 잠시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되지 않나? 이게 구원이 아니라면 뭐가 구원일까도 싶다.

내가 이 소설에서 좋아하는 부분은 라가불린(Lagavulin)에 대한 대목이다. 라가불린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나온다. 라가불린을 좋아한다는 여자에게 남자는 알면서도 라가불린은 어떤 술이냐고 묻는다. 달콤한 맛이냐 거친 맛이냐, 스모키향이냐 바닐라 향이냐 장미향이냐며. 여자는 딱 한마디 한다. “좀 드라이해요.”라고. 또 다른 여자는 특별한 날에만 라가불린 16년산을 마신다. 그 여자에게 특별한 날이란 기쁜 날이 아니라 슬픈 날이었다며, 라가불린은 그녀가 슬플 때 마시는 술이었다고 말한다. 모두 이 특별한 술집에 모인 남자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자들이다.

그러고서 좀 길게 라가불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라가불린은 물레방아 오두막이 있는 작은 골짜기라는 뜻이라고. 이걸 알고 라가불린이 더 좋아졌다고. 원래는 라가불린이 품고 있는 바다 냄새와 연기의 향이 그녀가 자란 고향의 저녁 풍경을 떠올리게 해 좋아했다면서. 이 부분을 읽으며 라가불린을 마셔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레방아 오두막 앞에 연기인지 안개인지가 피어오르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연기의 향과 맛을 느끼고 싶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술을 사러 갔다. 라가불린 16년산을. 나는 실제로 라가불린을 보고 더 반했다. 아직 병을 따지도 않았고, 그래서 냄새를 맡은 것도 아닌데. 병의 모양과 곡면의 경사도와 길쭉한 타원형 모양으로 붙어 있는 스티커가 마음에 들었다. 케이스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바위 폭포로 돌진하는 호수의 물. 황야의 피트. 이것들로 만들어 느리게 증류하고 길게 숙성시킨다. 이 모든 것들이 그윽하고 스모키한 캐릭터를 만들어낸다고.

소금이 아니라 바다다. 라가불린을 처음 마시고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저 짠맛이라고 하기에는 더 복잡하고 오묘하고 원시적인 무엇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건 파도였다. 해조류와 바다의 돌과 해변의 모래 맛이 나는 듯했고, 연기도 실려 왔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냄새가 담긴 연기가.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