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역사유적탐방] 이육사 문학관과 육우당

2022. 11. 4.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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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李相龍), 김용환(金龍煥) 등과 함께 안동 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는 이육사(李陸史·1904∼1944)이다.

2004년 그의 고향인 안동에 이육사문학관이 세워졌다.

안동시에서는 이곳 강변도로를 '이육사로'로 개칭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필자는 최근 이육사문학관을 찾았다가, 선생의 딸 이옥비 여사를 만나 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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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李相龍), 김용환(金龍煥) 등과 함께 안동 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는 이육사(李陸史·1904∼1944)이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광야’와 ‘청포도’ 시가 소개되어 우리에게 친숙한 이육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했다.

1904년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원촌마을)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祿) 또는 원삼(源三)이며, 활(活)로 개명했다.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5년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이황의 후손이라는 명문가의 자존심은 그를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죄수 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육사 문학관 옆에 위치한 육우당
출옥 후 다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3년 귀국하여 불후의 명시(名詩)들을 발표했다. 1943년 다시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후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2004년 그의 고향인 안동에 이육사문학관이 세워졌다. 안동시에서는 이곳 강변도로를 ‘이육사로’로 개칭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문학관은 크게 작품과 편지 등을 전시한 전시관과 생활관, 그리고 생가를 옮겨와 복원한 육우당(六友堂)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섯 형제의 우의를 지키는 집’이라는 뜻의 육우당은 원래 현재 청포도 시비가 세워진 원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조성으로 수몰되자, 1976년 4월에 안동시 태화동으로 이건되었다. 이후 생가의 기능이 훼손되자, 현재 위치에 고증을 거쳐서 복원하였다. 이 집에서는 육사와 원기, 원일, 원조, 원창, 원홍 6형제가 태어났으며, 육사는 16세까지 이곳에 살았다.

필자는 최근 이육사문학관을 찾았다가, 선생의 딸 이옥비 여사를 만나 뵐 수 있었다. 딸의 존재로 인하여 이곳은 더욱 역사적이고 친근한 공간이 되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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