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팍한 사기술” “쓸모없는 공상론”…말발의 시대 수놓은 ‘말싸움’[윤비의 칼과 펜]
민주주의가 연 ‘말솜씨 교육시장’에 일타강사가 된 소피스트들
소크라테스는 이들을 싫어했고 직접 나서 한판 붙는다
■소피스트
아테네 민주주의는 시민들에게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수만명의 시민들이 이러저러한 공직이나 공무를 수행하며 수입을 얻었다. 존경받고 권력과 수입이 따라오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도 당연히 커졌다. 좋은 집안 배경과 학식에 덧붙여 개인의 능력, 특히 시민들을 움직여 자기 편에 표를 던지게 할 말솜씨가 중요해졌다.
말솜씨는 송사에서 이기기 위해서도 중요했다.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지도자를 우리 손으로!’나 ‘우리 관리들을 우리 손으로!’만이 아니라 ‘재판도 우리 손으로’를 의미했다.
시민들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거나 잘못에 대해 변명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언변이 필요했다.
문제는 그런 말솜씨가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지혜롭다고 소문난 소크라테스에게도 시민들의 회합과 재판에서 말로 치고받는 일은 어려웠던 모양이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신을 모독하고 젊은이들을 이상한 생각에 물들였다는 이유로 멜레토스를 비롯한 시민들에게 고발당한다. 그 자리에 불려나온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이런 송사에서 자기를 변호할 언변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은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논리적 허점을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에둘러 파고들면서 상대방을 아예 갖고 논다. 아무리 대화편이 플라톤에 의한 창작이라고는 해도 소크라테스가 정말 어눌했을까 하는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민주주의와 더불어 정치에도 말의 시대가 열렸다. 타고난 말발이 없다면 배워야 했다. 아니면 바보가 되고 심지어 큰 손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집안이 ‘빵빵’해서 이리저리 인맥이 좌악 깔려 있거나 돈이라도 많아서 평소에 인심을 써 내 편을 많이 만들어놓을 수 없는 바에는 아는 것이 정말로 힘이 되는 세상이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라온다. 공급자는 소피스트들이었다. 소피스트들의 상당수는 다른 시민들에게 얕보이거나 뒤통수 맞지 않고 대접받으며 법정이나 정치판에서 자기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말발의 화신 같은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중 ‘일타강사’들은 꽤 돈을 벌고 명성을 누렸다. 고르기아스나 프로타고라스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민주주의가 거대한 교육시장을 연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들을 싫어했다. 이들은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얄팍한 기술(혹은 사기술)을 가르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는 이 유명한 스타 소피스트에게 뭔가를 배우려고 들뜬 젊은이 히포크라테스(유명한 의학자와는 다른 인물이다)를 끝까지 말려보려고 심지어 새벽부터 따라나서 결국 프로타고라스와 직접 한판 붙는다.
물론 소피스트들도 소크라테스를 좋아할 수 없었다. 대화편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와 맞상대하는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가 가르치는 철학이라는 것이 법정이나 민회에서 스스로를 보호조차 못하는 쓸모없는 공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웃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리스의 보수적인 시민들에게는 소피스트나 소크라테스나 도긴개긴처럼 여겨졌다는 것이다. 지난 편에서 이야기한 희극 <구름>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의 수괴쯤으로 그려낸다. 소크라테스는 경마에 미쳐 가산을 탕진한 아들 때문에 절망한 스트렙시아데스 앞에서 자신에게 단 며칠만 수업을 받으면(당연히 수업료가 있다) 돈을 한 푼 갚지 않아도 되는 신묘한 논리와 언변을 배우게 된다고 광고한다. 옳고 그름을 말발로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작품은 소크라테스가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치도곤을 당하는 것으로 끝이난다.
소크라테스도 이 작품을 직접 보고 꽤나 억울해했던 것 같다. (아니면 플라톤이 스승의 마음을 그렇게 짐작했을 수도 있다.) <변론>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직접 이 작품을 이야기하며 어처구니없어 한다.
여하튼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를 보면 너 잘 만났다는 식이었고, 말싸움이 붙으면 절대 피하지 않았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말싸움을 남긴 것도 여럿이다. (물론 대화 그대로의 녹취록은 아닐 것이고 이리저리 가공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중 칼리클레스나 프로타고라스와의 대결은 짧게나마 이번에도, 그리고 좀 더 길게는 이전 연재에서 언급했다. 이외에도 정말 유명한 대결이 하나 있다. <국가>에 등장하는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의 대결이 그것이다.
■트라시마코스
트라시마코스라는 인물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의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는 몇개의 글줄만으로 그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알아내기는 어렵다. 출신은 보스포루스 해협, 지금의 이스탄불을 마주 보는 칼케돈이다. 다른 수사가나 철학자들의 말에서 유추해보면 그는 꽤나 알려진 수사가이고 연설가였던 것 같다.
트라시마코스가 오늘날에도 쉬지 않고 논의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독특한 대답 때문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페이라이에우스 항구에서 열린 제전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난 글라우콘, 아데이만토스, 폴레마르코스 등의 젊은이들과 정의의 의미를 두고 논의를 벌인다. 트라시마코스도 이 자리에 있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주장도, 말하는 태도도 모두 싫어했던 것 같다. 플라톤은 그를 매우 공격적인 인물로 그려낸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트라시마코스의 설명은 아주 짧으면서도 도발적이다. 정의란 강자에게 이로운 것이다. 트라시마코스는 자신의 주장을 이렇게 부연 설명한다.
“정의는 강자에게 이로운 것”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도발과
“속이지도 때리지도 않아도 되는 질서를 만드는 것”이라는 반박
흥미롭게도 보수적 시민들은 양자의 대립을 도긴개긴으로 여겼다
“정부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법률을 만들죠. 민주제는 민주제다운 법률을, 그리고 참주제는 참주제다운 법률을 만들고, 그 밖에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죠. 이런 법률들을 만듦에 있어서, 그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곧 의로운 것이 된다고 선언하고, 그것을 벗어난 사람은 범법자요, 부정한 사람으로서 처벌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것은 곧 이것이에요. 즉, 모든 나라에서 정의는 다 같은 것이고, 그것은 지금의 정부에 대해서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조우현 역)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간단하다. 정의나 법이라는 것이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알고 보면 힘있는 자들이 자기들 입맛에 따라 마음대로 상상한 것을 번드르르한 말로 잘 포장한 후 ‘안 지키면 재미없어’라는 식으로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는 당시의 정치질서와 법에 대한 강한 불신감이 담겨 있다. 문제는 이런 불신을 그 혼자만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글라우콘 역시 트라시마코스에게 약간이나마 공감을 보이면서 마찬가지 불신을 드러낸다.
글라우콘에 의하면 사람들은 원래부터 남을 속이고 이득을 취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인간들이 정의와 법을 만들어내는 것은 남한테 속아 바보가 되거나 해코지당하는 것을 더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법률을 정해서 상대방을 갈취하는 일도, 상대방에게 갈취당하는 일도 없이 살아가려고 한다. 정의와 법률이란 것이 이렇게 탄생한다. 그러나 본성은 개 못 준다. 만일 남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다면, 혹은 남을 힘으로 누를 수 있는 경우라면 인간은 그런 법이나 정의 따위는 깨끗이 무시할 수 있는 존재이다.
글라우콘은 리디아에 살았던 기게스라는 인물을 예로 들어 이것을 설명한다. 이야기에 따르면 기게스는 원래 목동이었는데 어느 날 끼면 안 보이게 만드는 마법반지를 손에 넣는다. 이렇게 투명인간이 되자 그는 악한으로 돌변한다. 기게스는 왕궁에 들어간 후 반지의 힘을 이용하여 왕비를 유혹하고 함께 공모하여 왕을 죽이고 권좌를 차지한다. 이렇게 인간은 남에게 안 들킬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이다.
글라우콘의 이야기 요지는 이렇다. 힘과 꾀를 발휘하여 안 들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들은 정의나 법을 지킬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자들 앞에 정의나 법은 무력하다. 무력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자들이 힘없고 어리숙한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좋은 방패막이 된다. 정의와 법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이들이 마음대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동안 사람들은 ‘정의로와야 해!’ ‘법을 지켜야 해!’라고 중얼거리며 손놓고 넋놓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정치의 위험
정의와 법이라는 이름하에 힘있고 약아빠진 일부가 어리숙한 나머지를 착취하고 이용한다는 생각은 오늘날에도 흔하다.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의 그리스도 그랬다. 실제로 군주정이건 민주정이건 모두가 결국 자신의 잇속만 차린다는 비판에 고개를 끄덕인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트라시마코스나 글라우콘의 주장은 이런 현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에는 위험한 칼날이 감추어져 있다. 이들이 정의롭지 못한 정치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정의 자체를 아예 상대화하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트라시마코스나 글라우콘의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정의로운 시민이란 힘없고 눈치없어서 이용당하는 바보들이다.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면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안 들키고 속여가며 이득을 취하는 잔꾀를 익히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런 논리는 자칫하면 부정과 일탈을 부추길 수 있다. 상호 불신이 만연한 그런 정치공동체는 궁극적으로 내란에 의해서든 혹은 다른 방식으로든 해체될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코스와 글라우콘의 주장을 반박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에는 모두가 합의하고 따를 분명한 내용이 있다고 여겼다. “네가 나를 때리고 속이니 나도 너를 때리고 속이겠다”가 아니라 “너와 내가 모두 속이지도 때리지도 않아도 살 수 있는 질서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라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했다.
소크라테스의 정치철학, 혹은 그의 제자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빌려 세상에 내놓은 정치사상의 핵심 요지는 여기에 있다. 다음 편에서 이야기를 계속한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치이론을 역사 및 문화와 관련지어 연구한다. 베를린 훔볼트대 정치학과 및 역사학과,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서양정치사상을 강의하였다. 가르친다는 일을 영광으로 여기며 산다. 2021년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독일에서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2018~2020년 한겨레 신문에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를 연재하였고, EBS <지식의 기쁨> <세바시> 등에서 강연하였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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