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의 그림] 장식 하나 없이 소박한 聖像···숭고함으로 세상 모두를 품는듯
원로 조각가 최종태의 '예수성심상'
넉넉한 두팔·평범한 모습에 더 친숙
성당 벽엔 '십자가의길 14처' 성화 걸려
간략한 선으로 예수의 고난·부활 담아
최의순의 한국천주교사 새긴 '청동문'
무게 줄이기 위해 납작하게 수정 거듭
생생한 환조서 선만 남은 형태로 변해
22년간 창고에 있다 지금의 정문으로
“슬픈 자, 우는 자, 힘겨운 자, 아픈 자 모두 내게로 오세요.”
세상 모두를 안아줄 듯 넉넉한 두 팔이다. 명동성당을 향하는 언덕배기 중턱에서 만나는 ‘예수 성심상’은 원로조각가 최종태(90)의 작품이다.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높이 230㎝에 쭉 뻗은 양팔 폭이 216㎝인 작품이다. 십자가도 없고 머리 뒤 후광도 없는 예수상이다. 장식이라고 할 것 하나 없이 소박하게 걸친 옷이 목 아래로 드리운 주름 두 줄만 있을 뿐이다. 미켈란젤로 스타일의 르네상스 시대 성상(聖像)에 익숙한 눈으로 보자면 맥없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작가는 공허한 풍요로움을 버리고 ‘고귀한 단순함’을 택했다. 서양식 종교 조각이 그 신령스러운 힘을 유려한 옷 주름으로 표현하는 것과 달리 예수상은 주름 없고 담백하다. 꾸밈이 사라진 자리에 정신성이 남았다. 특별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숭고함으로 가득 찬 형상이다. 두드러지는 것이 있다면 얼굴만큼 더 큰 손이다. 차가운 돌로 만들어졌지만 따뜻한 온기를, 다 끌어안을 듯한 넉넉함을 전한다. 깊게 패인 눈, 길게 뻗은 코, 조금 패인 양 볼이 슬픈 얼굴로도 보인다. 인류를 대신해 희생을 택한 예수의 숙명과 사랑이 느껴진다. 당신들의 모든 고통과 아픔은 내가 다 짊어지고 갈테니 평화와 행복만을 안고 가소서.
1898년에 완공된 고딕 양식의 명동성당 내부에는 서양식 예수상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손됐고 그 뒤에 설치된 것마저도 부서졌다고 한다. 최종태의 ‘예수성심상’은 1987년에 성당 앞에 설치됐고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축복했다. 하지만 2011년 이후 명동대성당의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면서 진입로 오른쪽의 교구청 마당으로 이전됐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성(聖) 미술을 담당하는 정웅모 신부(에밀리오)는 “평범한 모습이라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이 성상을 통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했던 마태복음 속 예수님 말씀을 되새길 수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원래 있었던 명동성당 입구의 마당으로 옮겨 가장 빛날 수 있는 자리에서 더 많은 사람을 품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종태는 ‘한국의 미’를 찾아 평생 매달린 조각가다. 인간을 표현하되 가장 진실한 형태의 알맹이만을 추구한다. 그래서 단순하다. 종로구 혜화동 성당의 ‘성모상’, 그 인근 길상사의 ‘관음보살상’이 그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주로 여인상을 만들었던 최종태 작가가 남성 독립조각으로 제작한 사례는 이곳 명동성당의 ‘예수상’과 혜화동 성당의 ‘요셉상’뿐이다.
명동성당은 마음이 지치고 스산할 때 도심 한복판에서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쉼터 중 하나다. 종교시설이기는 하나 종교와 무관하게 들를 수도 있는 곳이다. 방문객들은 보통 명동성당 정면 양쪽의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성당 안에는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가 고난 속에 이동한 경로인 14처를 그림에 담은 성화(聖畵)들이 양 벽에 걸려 있다. 가톨릭에서는 이를 ‘십자가의 길’이라고 부른다. 이 또한 최종태의 작품이다. 최 작가는 앞마당의 ‘예수성심상’을 제작한 뒤 곧바로 ‘십자가의 길 14처’ 제작에 돌입했다. 연희동 성당에 이어 최 작가가 제작한 두 번째 ‘십자가의 길’이었다. 이 또한 일반적이지 않다. 간략한 선으로 툭툭 새긴 듯한 최종태 특유의 작품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청동 부조다. 사형선고를 받은 예수, 십자가를 짊어진 모습, 넘어지는 장면, 어머니를 만나는 순간 등이 차례로 펼쳐진다. 고통스럽게 한 발짝씩 걸어가는 예수를 보며 흐느끼는 여인들을 볼 수 있다. 자신을 위해 우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예수도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는 장면은 큰 손이 두드러지게 표현했는데 그 모습이 밖에서 본 예수상의 큰 손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12번째 장면에서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고 만다. 이곳의 ‘십자가의 길’은 14처에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15번째 그림을 통해 더 큰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곳 명동성당만이 가진 희귀작 중 하나는 정문이다. 원로 조각가 최의순(88)의 작품으로 250×125㎝ 크기의 청동문인데 사연이 기구하다. 작품을 의뢰받은 것은 1985년, 당시 명동성당 김수창 주임신부가 최의순에게 부탁했다.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던 최의순 조각가는 앞서 1967년 절두산성지성당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만든 적이 있었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는 기념 메달도 작업했다. 경험은 있었으나 한국 천주교의 얼굴인 명동성당에서 정문을 맡으니 책임이 더욱 무거웠다. 최의순 작가는 “어떤 주제로 무엇을 표현할지 좀 막막했기에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면서 “명동성당이 가진 역사적 배경을 근간으로 ‘한국천주교회사 부조’를 만들기로 했다”고 회고했다.
작품은 상단과 중간부, 하단으로 크게 나뉜다. 위쪽에 갓 쓴 선비 두 명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미사를 집전한 주문모(1752~1801) 신부와 우리말 교리서 ‘주교요지’를 편찬한 명도회 정약종(1760~1801) 회장이다. 가운데에는 청나라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던 선교사들이 정식 입국심사를 피해 성벽 하수구로 드나드는 모습, 박해를 피해 길을 떠나는 신자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하단은 초기 천주교가 펼쳤던 복지 활동이다. 아이를 안은 여인, 노인을 부축하는 여인들이 보인다. 3년에 걸쳐 초기 천주교 역사를 공부하고 현지 답사를 진행했던 최 작가는 “파리 외방 전교회 출신 메스트르(1808~1857) 신부가 고아들을 데려다 젖동냥으로 돌봤던 모습을 아이 안은 여인들로 표현했다”면서 “그 옆에는 초기 약국이라 할 수 있는 ‘시약소’에서 노인을 돌보는 모습을 담았는데 약탕기 모양도 새겨 넣었다”고 말했다. 작품이 완성됐으나 청동의 무게를 건물이 지탱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300㎏이 최대치라고 했다. 작품 수정이 불가피했다. 최 작가는 “처음에는 입체감이 생생한 환조 형태로 제작했는데 무게를 덜어내기 위해 더 납작한 형태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야 했다”면서 “그 결과 아주 납작한 저부조가 됐고 볼록했던 약탕기도 선만 남은 형태로 바뀌게 됐다”고 말했다. 공들여 다듬었건만 여러 사정으로 청동문은 제자리가 아닌 명동성당 창고에 잠들어 있어야 했다. 22년이 흘러 명동성당의 정문 교체가 논의됐다. 누군가 창고 안 ‘청동문’의 존재를 떠올렸고 당시 자문위원 중 한 명이었던 윤명로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가 “최의순 조각가의 작품 같다”고 얘기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2009년에서야 비로소 본래 약속된, 지금의 자리로 청동문이 옮겨온 사연이다.
납작한 장면은 가까이서 공들여 봐야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희미한 기억이요, 희미한 역사지만 분명하게 아로새겨진 시간들을 보여준다. 22년을 견디고 다시 걸린 이 문은 믿음의 힘과 함께 모든 것이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울림을 전하기도 한다.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ccsi@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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