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엔저 덮친 日···100엔숍 사라지고 뒷골목선 '눈물의 폐업'
다이소, 고물가에 원가부담 커지자
저가정책 대신 '좋은 제품' 전략 수정
편의점도 잡화점과 손잡고 구색 강화
'원스톱 쇼핑'으로 매출 확대 안간힘
백화점 명품·대로변엔 사람들 북적
뒷골목 상점은 '눈물의 폐업' 잇따라
지난달 31일 일본 도쿄의 대표 번화가인 긴자. 유명 백화점과 명품 브랜드 매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老鋪)들이 어우러진 이 ‘호화 거리’는 평일 낮에도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백화점에는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이름만 대면 알 법한 명품 매장 앞에는 여전히 긴 줄이 이어졌다. 그렇게 긴자는 일본 ‘고급 소비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큰 건물 뒤편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골목 곳곳에서 일본에 불어닥친 인플레이션과 환율 쇼크로 인한 ‘또 다른 얼굴’이 포착됐다.
긴자 복합 쇼핑몰 ‘마로니에게이트2’ 빌딩 6층에 들어선 다이소 매장은 고물가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유통 업계의 ‘룰 파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날 찾은 매장은 ‘100엔숍’으로 친숙한 기존의 다이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다이소 간판 옆으로 ‘스탠더드 프로덕츠’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데 백화점 잡화 코너를 연상시킬 만큼 고급스러운 나무 선반 위에 그릇과 각종 생활용품이 진열돼 있다. 가장 싼 제품은 300엔으로 이곳에서는 1000엔 제품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다이소는 올 4월 100엔숍이라는 브랜드 정체성을 포기하고 이 매장을 선보였다. 전 세계적으로 물가가 오르며 제조원가에 물류비 부담이 불어났고 기존의 가격정책으로는 수익을 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에 다이소는 ‘조금 더 나은 것이 훨씬 더 낫다’를 내걸고 기존 100엔숍과 투트랙 전략을 전개하고 나섰다. 격전지로 고급 소비의 대표 거리인 긴자를 선택하고 수상 디자인을 제품에 채택하는 등 퀄리티를 끌어올린 이유다. 매장에서 만난 고바야시 아이(33) 씨는 “기존 다이소를 생각하면 비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디자인이나 품질 면에서 다른 상점에서 살 때보다는 그래도 가격 대비 만족도가 좋은 것 같아 자주 온다”고 말했다. 다이소는 스탠더드 프로덕트와 함께 300엔숍 브랜드 ‘쓰리피(THREEPY)’ 등 새 브랜드 매장을 늘려갈 계획이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건 한때 ‘소비 왕국’의 주역이던 편의점도 마찬가지다. 일본 편의점들은 비(非)식품 부문을 강화하며 한 번 들른 고객들이 ‘더 많이 살 수 있도록’ 구색을 확보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도쿄 주요 상권의 세븐일레븐 점포는 다이소와 대형 잡화점 로프트(LOFT)의 특별 매대를 설치하고 두 회사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세븐일레븐은 코로나19로 매장 방문 고객이 줄고 매장 포화로 점포당 매출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타개책으로 ‘일용 잡화 비중 확대’와 ‘타 업체와의 제휴’를 택했다. 고객이 편의점에 왔을 때 필요한 물건을 한 번에 살 수 있는 ‘원스톱 쇼핑’을 위한 구색을 강화하고 매출의 요소인 방문객 수와 객단가 중 후자를 높여보겠다는 것이다. 세븐일레븐의 자체브랜드(PB) 상품 중 겹치는 품목이 있지만 생활 잡화의 다양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지금의 제휴를 이어가고 적용 매장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대해 아오야마 세이치 세븐일레븐 상품본부장은 “잡화도 급해서 사는 게 아니라 목적을 갖고 구입하는 대상이 됐다”며 “수요 변화에 속도감 있게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로손도 무인양품 상품을 매장에서 함께 취급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으며 패밀리마트는 지난해 3월 유명 디자이너와 협업한 PB 의류 브랜드를 론칭, 티셔츠와 양말·타월 등을 선보였는데 2021년 의류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배 이상 늘자 관련 카테고리를 강화하고 나섰다. 실제로 이달 1일 오후 패밀리마트 아오야마빌딩점에는 편의점에 들른 직장인들이 많았는데 이들 중에는 커피나 간식과 함께 양말, 압축 외투 등을 함께 계산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쪽 매대에서 양말을 살펴보던 한 고객은 “회사가 근처라 가끔 도시락을 사러 오는데 예쁜 색상의 의류가 많고 가격도 그다지 부담스러운 편은 아니라서 종종 같이 사가고는 한다”고 전했다.
일본 유통 업계의 이 같은 몸부림은 국제 원자재·에너지 가격 상승에 엔화 가치 급락이 겹치며 더욱 심화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속 엔저는 내수 기업이나 가계에 모두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일본 총무성이 최근 발표한 도쿄 23구(區)의 10월 소비자물가지수(신선식품 제외)는 지난해 동월 대비 3.4% 올라 소비세율 인상 영향을 제외하면 1982년 6월(3.4%) 이후 40년 4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소비자물가 고공 행진 속에 닫히는 지갑을 열기 위해 정체성 버리기(다이소), 타 점포 동거(편의점) 같은 유통 업계의 ‘생존형 룰 파괴’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재료 가격, 인건비, 물류비 상승에 현행 가격으로 품질과 서비스를 유지하는 게 곤란한 상황이 됐습니다. 메뉴 가격을 변경(인상)하게 돼 죄송합니다.’ ‘전 품목 50% 세일. 13년간 오랜 시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0월 31일까지만 영업하고 폐점합니다.’
긴자와 오모테산도 등 도쿄의 쇼핑가 대로변은 일본 내국인은 물론 엔저로 몰린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뒷골목의 적지 않은 상점들은 폐점 뒤 공사 중이거나 문 앞에 ‘마음 아픈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대형마트에서는 식품 마감 세일 15% 할인 스티커를 (일정 시간이 지나) 점원이 20%로 바꿔 붙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가져가는 고객들도 눈에 띄었다. 그렇게 인플레이션과 엔저가 겹친 일본에서는 소비의 양극화, 그리고 이 틈에서 지갑을 열고, 새 수익원을 찾아내려는 유통 업계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도쿄=송주희 기자 ssong@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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