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 타고 그렸다, 내 마음 깊은 곳의 공포와 사랑
보랏빛 몽환적인 장면이 어떤 상황인지 도통 모르겠다. 잘 차려진 테이블에 토끼를 닮은 듯한 존재들이 속도감 있게 스쳐가듯 등장하고 엄청나게 커다란 이파리와 꽃잎이 주인처럼 행세한다. 작은 체구의 송승은 작가(31)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그렸다는 300호 크기 대작 'Overgrown plants1·2(사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로 작가가 질문을 던진다.
레트로(복고풍) 감성의 젊은 작가는 일상적인 장면에서 사랑스러움과 공포가 공존하는, 개성 강한 조형 언어를 구사한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그의 첫 개인전이라 할 수 있는 '미끄러진 찻잔'이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오는 12일까지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은 작업실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커피잔에서 영감을 받았다. 작가는 "뭔가 속마음을 딱 들켰을 때의 나, 어설픈 나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신작 24점은 어떤 호기심이 생기고 기대가 가득한데 그 기대가 예기치 못한 일로 망쳐지는 순간, 그때의 놀라움과 아쉬움을 극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1991년생인 송 작가는 동화 같기도 하고 만화 같은 도상에 해체주의적인 구성, 몽환적인 색감이 특징이다. 화랑미술제와 아트부산 등 아트페어에서 작품 구매 '오픈런'을 일으켰다.
작품 속에는 테이블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하는 곳에 있는, 인간관계 속에서 비롯된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친숙한 소재와 함께 다가온다. 작가는 '매니악 맨션' 같은 아케이드 게임과 1960년대 애니메이션을 즐기며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잡을 수 없는 것들'이란 작품은 색채가 무너져 내리고 환영 같은 존재가 드러나 독특하다. 인물화인지 정물화인지 헷갈린다. 꽃을 그린 정물화가 분명한 작품에서도 핑크색 위에 초록색이 얹혀 있어 셀로판지를 겹친 듯 나오는 색깔이 미묘하다. 그림자 속이나 역광의 빛을 탐구해 대상을 해체하듯 표현한다.
미술평론가 안소연은 "송 작가는 형태의 윤곽 너머에서 색채의 관계로 재매개된 형상들의 어울림을 좀 더 추상적이고 실존적인 것으로 규명해 보이려 한다"면서 "형상의 출현을 도왔던 추상적 장소로서의 윤곽을 (빛에 의해) 임시적으로 구축된 한시적 지지체로 전락시켜 놓았다"고 평했다.
이혜미 아트사이드 갤러리 대표는 연초마다 젊은 유망 작가들을 모아 3인전을 전통처럼 펼치면서 송 작가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송 작가 작품은 특유의 몽환적인 색감이 자꾸 생각나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 나만의 공간에 감춰두고 보게 된다"며 "본인만의 조형 언어가 분명해서 어떤 장르든 송승은화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갤러리 층고가 5m나 돼서 젊은 작가의 소품 전시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이 대표가 대뜸 "300호를 그릴 수 있냐"고 물었고, "할 수 있다"는 답에 믿고 맡겼다. 이 대표는 이번에 작품을 보고 송 작가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해서 제대로 보여줬기에 기뻤다. 그는 "송 작가 작품이 다른 중견 작가와 맞먹을 정도로 정말 단단하다고 생각했다"며 "고야나 렘브란트 등 미술사에 중요한 작가들을 연구하면서 열심히 작업하는 모습이 미덥다"고 말했다.
1999년 부친 뒤를 이어 대표직에 오른 이 대표는 미국 아트인스티튜트 오브 시카고에서 미술을 전공한 안목과 중국 베이징과 서울에서 쌓은 화랑 경력 15년으로 역량 있는 신진 작가 발굴에 열성적이다. 그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자신만의 조형 언어가 분명한 작가들을 발굴해 소개한다"고 했다. 송 작가 외에도 최수인, 오병욱, 최진욱, 문연욱, 원석연, 기욤 티오(스페인), 이수경 등 8명을 전속 작가로 두고 있다.
[이한나 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韓美 "北 핵공격땐 김정은 정권 종말" - 매일경제
- [속보] BTS 진, 입영연기 취소원 제출…이르면 연내 육군 현역 - 매일경제
- ‘짝퉁’인줄 알았는데 진짜였다…101년만에 오명 벗은 이 그림 - 매일경제
- 팬데믹 기간에 오픈해 벌써 입소문 자자한 라스베이거스 이곳 - 매일경제
- [단독] 김새론 생활고에 카페 알바설…사실이었다
- “쌍둥이 엄마 이영애입니다”…러 희생자父에 보낸 편지 - 매일경제
- '커피 한잔당 별 하나'는 구식 … 이젠 NFT 굿즈 쏜다 - 매일경제
- [신익수기자의 총알여행] 삶이란 굽이진 길 … 가을이 눈부시게 우릴 위로하네 - 매일경제
- 이정후 ‘무조건 전력질주’ [MK포토] - MK스포츠
- 김휘집 ‘더블 플레이’ [MK포토]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