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시대는 끝났다···제러미 리프킨 50년 연구 집대성[책과 삶]

이영경 기자 2022. 11. 4.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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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러운 약탈자였던 인류가 다시 자연의 보복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인류 멸종 위기는 누구 책임인가, 원죄는 데카르트·뉴턴까지 거슬러 오른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추구한 ‘효율성의 시대’는 철저히 실패했다
효율성에서 적응성으로, 성장에서 번영으로…발전과 번영의 역사를 폐기하라
2011년 미국 알래스카 해안의 영구동토층이 기온 상승으로 붕괴됐다. 영구동토층이 녹으면서 내부에 갇혀 있던 메탄이 대기 중으로 방출될 가능성이 우려된다. 미국지질조사소(USGS) 제공
기후변화로 자연재해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9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존슨데일 세쿼이아 국유림에서 산불이 일어나 수령 1000년이 넘는 나무 수천그루가 사라졌다. AFP연합뉴스

회복력 시대

제러미 리프킨 지음·안진환 옮김|민음사|432쪽|2만6000원

“우리는 어떻게 자연을 거의 무릎 꿇리는 약탈자가 되었다가 이제 우리를 내쫓기 위해 포효하며 돌아온 자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는가?”

제러미 리프킨의 신간 <회복력 시대>는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글로벌 그린뉴딜> 등을 통해 미래를 전망해 온 리프킨이 50여년에 걸쳐 글로벌 경제와 사회, 기후변화 등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집대성해 내놓은 책이다. 리프킨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지배하던 ‘진보의 시대’는 수명을 다했으며, 전례 없는 기후위기에 직면한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회복력(resilience)의 시대’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효율성’은 진보의 시대의 복음으로 “천연자원의 착취와 소비와 폐기를 최적화하고, 자연 전체가 고갈돼도 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증진한다는 임무”다. 효율성은 인간을 지구의 지배적 종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자연계를 파멸로 이끌었다.

회복력의 시대는 효율성에서 적응성으로, 금융자본에서 생태자본으로, 성장에서 번영으로, 소유권에서 접근권으로, 수직 통합형에서 수평 통합형으로, 중앙 집중형에서 분산형으로, 소비자 주권주의에서 환경책임주의로, 국내총생산(GDP)에서 삶의 질 지수로 시스템 전반을 변화시킬 것을 제안한다.

훌륭한 제안이다. 그런데 때로 ‘옳은 말’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너무 이상적이거나 지당해서 ‘내 일’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작금의 위기가 도래했다. 과학자들과 환경운동가들은 지구가 불타고 있고, 바다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경고를 일찌감치 던졌다. 머지않은 미래에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로 재앙이 다가올 것이 예견된다. 어쩌면 현재 유아들이 살아 있을 때 겪을지도 모른다.

리프킨은 마음이 급했다. 움직이지 않는 이들, 특히 현재 체제에서 가장 이득을 보고 있는 거대 기업들에 경종을 울려야 했다. 리프킨은 인류의 번영을 가져온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추구한 효율성이 전 지구적 관점에서 얼마나 철저히 실패했는지를 증명하는 데 주력한다.

아몬드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전 세계 아몬드의 80%는 이상적 기후 조건을 갖춘 캘리포니아 센트럴밸리에서 생산된다. 아몬드 꽃 수분을 위해서는 미 전역에서 벌집을 운송해야 하는데, 최근 몇년 사이 꿀벌이 떼죽음을 당해 개체 수가 급감했다. 설상가상으로 센트럴밸리가 가뭄에 시달리게 됐다. 아몬드 산업은 위기를 맞았다. “고도의 상업으로 여겨지던 것이 회복력이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자본주의 체제의 균열은 2020년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눈에 보이게 감지됐다. 미국 의료시설은 전염병에 대비하지 못했고, 방역 마스크와 개인 보호 장비, 항균 비누와 화장지 등도 없었다. 마트에 텅 빈 진열대는 효율성이 어떻게 위기에 대처하지 못하는지를 충격적으로 보여줬다.

브라질 아마조나스주에서 항공 촬영한 아마존 열대우림의 파괴 현장 모습. 과학자들과 환경단체들은 브라질 정부의 광업·농업 장려와 환경 범죄 방치로 아마존 열대우림 파괴가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5일 에티오피아 중부 지역 농부들이 가뭄으로 바짝 마른 땅에서 잡초를 솎아 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리프킨은 “책임의 상당부분이 경제적 이익을 증진하고 인류의 안녕을 보장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라는 명목하에 세계경제의 작동방식에 대한 내러티브를 제공한 과학계와 경제학계와 재계에 있다”고 말한다. ‘원죄’는 데카르트와 뉴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데카르트는 수학으로 무장한 인간의 사고가 지구 존재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뉴턴은 중력을 발견하고 세 가지 운동법칙을 제시했다. 관성, 가속도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으로 우주의 힘은 ‘평형’을 유지한다고 봤다.

이는 경제학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말로 시장의 수요와 공급 법칙을 설명했는데 이는 뉴턴의 작용 반작용 법칙에 기댄 것이었다. 뒤를 이은 경제학자들은 250년에 걸쳐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반응하고 조정하는 방식으로 움직여 합의와 거래, 평형에 이른다고 믿었다.

뉴턴의 이론엔 치명적 결함이 있었으니 모든 과정이 시간 가역적이란 점이었다. 자연계나 경제에서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성을 띠지만 뉴턴의 우주만은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 있었다.

이후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이 등장했다. 시간의 흐름을 담아낸 열역학 제1법칙은 우주 모든 에너지가 일정하다는 것, 에너지가 생성되거나 소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2법칙은 에너지가 사용할 수 있는 상태에서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한 방향으로만 바뀐다고 말한다. ‘엔트로피 법칙’이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시간이 가역적이라는 뉴턴식 세계관에 여전히 묶여 있었다. “시간을 초월한 진공 상태에 가둬 경제학자와 재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른 부작용을 편리하게 무시할 수 있었다.” 리프킨은 국가의 성장과 부를 측정하는 GDP 같은 지표가 터무니없다고 일갈한다. 순간적 교환 가치만을 측정할 뿐 장기적 영향을 고려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11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프레더릭 소디는 “열역학법칙을 맹목적으로 무시하는 경제학자들의 행태가 문명과 자연을 위기에 빠뜨리는 치명적 경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산업자본주의 250년 통치 동안 거둔 단기적 경제적 이익은 영겁의 시간 동안 부정적 외부 효과와 흔적을 남길 장기적 엔트로피 청구서와 비교할 때 극히 미미하고 덧없을 뿐이다.”

산업혁명 태동기 인구는 7억명이었으나 2000년 무렵 지구에는 60억명 이상이 살고 있다. 60억 인류가 남긴 엔트로피 청구서를 살펴보자. 산업화 시대에 전 세계 표토의 3분의 1이 황폐화됐다. 과학자들은 지구상의 인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표토가 60년 분량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표토 1인치를 채우는 데 500년이 넘게 걸린다. 표토가 사라진 원인에는 ‘녹색혁명’이 있다.

다수확품종, 단일재배 관행, 농약과 살충제의 사용, 일모작 토지에 삼모작 도입 등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전 세계 농업 생산량을 극적으로 늘렸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부터 수확량이 줄고 녹색혁명이 후퇴하기 시작한다. 쉼 없이 계속되는 재배로 토양은 유실되고, 석유화학비료가 더 많이 투입됐다.

이와 관련된 청구서 중 하나가 신데믹(syndemic)이다. 2019년 의학 저널 랜싯은 “비만과 영양 결핍과 기후변화가 결합해서 신데믹, 즉 전염병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는 보고서를 실었다.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심각한 요인 중 하나는 비만으로, 매년 400만명이 비만으로 사망한다. 이 질병은 녹색혁명과 관련이 있다. 석유화학 비료와 농약·살충제 사용이 영양소를 파괴했고, 식품 업계 수익 개선을 위한 저영양·고가공 식품은 비만을 유발했다.

과학계와 의료계는 코로나19 팬데믹과 비만, 영양 결핍, 기후변화 사이에 모종의 관계를 발견했다. 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할 위험이 가장 큰 사람은 당뇨병, 심장병, 폐 질환 위험성이 높은 만성 비만 환자로 “식품 산업계가 탄생시키고 구애한 집단이다.” 디스토피아적 전망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세계은행은 약물 내성 박테리아 감염이 다음 팬데믹일 것으로 내다봤다. 코로나19로 인한 폐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항생제 사용이 급증했으며, 이것이 내성균 돌연변이를 가속화해 기존 항생제 무기고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효율성과 수익성 추구는 전 지구에 대한 인클로저(중세 유럽 공동이용이 인정되었던 토지에 울타리를 쳐 사유지로 하던 일)를 초래했다. 유전자풀, GPS, AI에 의한 알고리즘 등을 통해 우리의 뇌를 재배선시키고, 정체성에도 ‘울타리’를 치고 있다고 리프킨은 지적한다.

녹색혁명이 비만과 연결되고, 팬데믹과 연결되는 방식은 인간이 외부 세계와 단절된 개체가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우리 몸속엔 박테리아가 38조개, 바이러스가 380조개 있으며, 인체의 57%는 우리 몸에 사는 미생물로 구성돼 있다. 미국국립보건원은 인간 미생물체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유명 과학 기관이 인체를 생물군계(주요 서식지를 차지하는 동식물의 자연 발생적 대규모 군집)로 인정한 첫 사례”다. 이는 ‘생태적 자아’의 출현을 암시한다.

리프킨은 효율성이 지배한 자본주의 실패를 역사적·과학적·경제적인 면에서 낱낱이 파헤친 뒤 회복력 시대로의 전환을 이야기한다. 화석 에너지 대신 태양광과 풍력 에너지를 공유하는 생물권 정치, 생태 지역 거버넌스, 생명애 의식 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길고도 암울한 엔트로피 청구서를 보면, 이 ‘훌륭한 제안’은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이행각서처럼 보일 것이다.

리프킨의 비전이 낙관적이고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면도 있다. 리프킨은 “진보의 시대는 대중의 담론에서 진혼곡도 없이 조용히 물러났다. 어디서든 적응성과 회복력을 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의 지도자는 자유 시장주의를 신봉하며 효율성이란 ‘보이지 않는 손’이 마법을 부릴 것이라고 여전히 믿는다.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는 1979년에 쓰였다. 2022년엔 <회복력의 시대>가 더 현실적이며 긴요한 책으로 보인다.


☞ 리프킨 “멸종의 길 달려온 인간···이제 인간이 자연에 적응할 때”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2211071700011


☞ [7인의 석학에게 미래를 묻다]②제러미 리프킨 “코로나는 기후변화가 낳은 팬데믹…함께 해결 안 하면 같이 무너져”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5140600005

회복력 시대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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