핼러윈 탓보다 재난과 위험에 대처하는 안전교육 절실 [쓴소리 곧은 소리]
학교에서 철저히 준비되고 교사·학생 진지하게 참여하는 비상 대피 훈련 필요
(시사저널=성명경 국제학교 교사)
재난영화의 한 장면이 10월29일 밤 이태원에서 벌어졌다. 외국인 친구와 함께 올랐던 언덕길이 처참한 지옥의 현장으로 비쳤다. 너무나도 가슴 아픈 사건이다.
고대 켈트족의 귀신을 쫓던 축제인 핼러윈이 언젠가부터 한국의 유치원에도, MZ세대들의 세계에도 보편화된 문화행사로 자리매김해 왔다. 주로 중·노년층에서 핼러윈의 국적 불명이나 지나친 상업주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소리가 나온다. 그분들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핼러윈이 한국 사회에 상당히 정착된 보편적인 세계 문화축제이며 젊음과 다국적 문화 융합의 장이 되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태원은 한국에서 특별한 향수를 동반한 장소다. 쇼핑과 먹거리가 풍부하고 오랜 미군 주둔의 영향으로 한국인에겐 이국 취향, 외국인에겐 고향의 정서를 자극하는 곳이다. 서울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은 다양한 국가의 음식을 체험하고 네일숍을 방문하던 이 거리를 추억한다. 서구 문화 수용의 주체 집단이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정체성 확립의 휴면기에 들어간 2022년의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멋진 코스튬을 구입하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린다. 쿨함의 증거이고 그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청년들은 지난 3년간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 규칙을 지키며 대학입시와 취업 준비에 찌들었던 세계에서 탈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에 공부하러 온 각국의 청년들도 축제에 합류했다. 에너지를 외부로 분출해야만 하는 청년들은 정체성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다. 코로나와의 싸움에서 그들의 에너지는 탈출구를 찾고 싶었다. 청년들은 그동안 혼란스럽던 정체성의 유예기를 벗어나 잃어버린 자신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을 찾고 싶은 청년들은 마녀와 텔레토비로 분장하고 가족들도 세계인들의 축제에 동참하고자 함께 거리로 나섰다.
2002년 서울 월드컵의 추억: 열광적이면서 놀라운 질서 의식
필자의 학교 동료인 '이디 문'씨는 선교사의 자녀로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국인 교사다. 그녀는 한국 생활에서 2002년 월드컵의 영광을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꼽는다. 수십만 명의 사람이 거대한 스크린으로 월드컵 경기를 관람하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한다.
거대하고 열광적인 행사에 한국인들은 서울시청 앞에서 놀라운 질서 의식을 선보였고, 일사불란하게 '대한민국'을 외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고 회고한다. 한국인들의 질서 의식에 감탄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녀가 한국에서 얻게 된 가장 좋아하는 추억 중 하나는 한국 팀이 이탈리아를 꺾은 후 이태원 거리에서 춤추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지켜본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지난 3년간 학창 시절을 마스크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기 힘든 시기를 겪은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핼로윈의 축제를 통해 그간의 숨 막힌 긴장을 풀고 싶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디 문'씨는 예전의 한국 청년들보다 요즘 한국 청년들은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고 싶은 내적인 욕구가 강하다고 말한다. 머리를 노랗고 파랗게 물들이고 타투를 한 청년들의 모습이 자연스러워진 것이 현재 한국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가 학기 초마다 가장 중요시하는 교육훈련이 있다. 학교 전체 비상 대피 훈련이다. 화재, 지진, 전쟁 등 예기치 않은 다양한 재난의 발생을 대비해 교사와 학생이 함께 연습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훈련은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되고 계획된 교육훈련 과정이다. 교사나 학생 모두 진지하게 임해야 하는,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는 실습 활동이다.
학교는 훈련을 위해 여러 예상 상황을 검토하고 확인하며 실전과 똑같은 수준으로 연습에 돌입한다. 교사와 학생들에게는 매년 심폐소생술(CPR)을 실습하는 것이 의무다. 이번 참사 화면을 보면서 119 구급대원들과 일반 시민이 너도나도 CPR을 실시하는 모습은 슬프고 안타까운 광경으로 비쳤다.
화재·지진·전쟁 땐 타인 배려가 결국 자기 생명도 살려
이 사건에서 외면하는 사람도 보였고, 이타적으로 한 명의 목숨이라도 살리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도 보였다. 부조리한 사태에 대처하는 다양한 인간형으로 대비되었다. 학교 교육은 학과목의 내용학습만이 아닌 실생활을 통한 지식의 습득과 함께 타인을 위한 공감과 봉사를 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키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교육훈련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은 비상상황이 벌어졌을 때 대응하는 행동도 다를 것이다.
전 세계는 코로나19로 수많은 목숨을 잃었다. 기후변화로 인한 홍수 피해로 세계 각국에서 인명피해가 극심했다. 제2의 코로나, 기후 문제, 새로운 재난의 형태로 예기치 못한 위협에 직면할 수 있다. 이태원 현장에서 이타성을 보여준 우리 국민의 세계시민 의식은 비록 많은 인명을 구하지 못했어도 큰 울림을 주었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위해 학교와 사회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위급한 상황을 맞아 빠른 판단과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공공 안전교육을 반복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합리적 원칙을 수립하고 배려와 공감 능력에 바탕을 둬 함께 위기를 탈출하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이태원 참사 같은 큰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정신적·사회적 치유도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대체로 청소년이나 2030 청년세대가 많을 텐데 그들 중에는 자신이 현장에 있었던 사실 자체가 부모들에게 걱정을 끼칠까 봐 아예 말문을 닫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트라우마 치유는 내면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서 시작한다. 주변의 공감과 대화가 필수적이다. 부모 세대가 이번 사건의 문제는 이태원의 핼러윈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공공 안전교육의 미비에 있다는 본질적인 성찰 쪽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본다. 허심탄회한 대화와 성실한 위기 대응 훈련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번을 계기로 재난과 위험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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