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그 11월이 다시 찾아왔다
강석우 영화배우
어머니, 김장 거의 혼자서 다해
중노동에 앓으시던 모습 떠올라
젊은 날의 나는 핑계 대며 외출
그날의 약속 미룰 수 없었을까
가슴 아픈 후회의 눈물 훔친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기에
올여름 태양은 우리의 팔과 얼굴을 익히려고 작정한 듯 그렇게 뜨거웠다. 그런데도 좋은 계절 가을은 반드시 온다는 믿음으로 겨우 참고 견뎠는데, 계절이 바뀌는 길목은 역시 순탄치 않았다. 예외 없이 위력적인 태풍과 폭우가 우리를 힘들게 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변하는 계절에 따라 우리는 ‘아! 올여름 더위는 정말 대단했어’ ‘이번 강추위는 내가 겪은 추위 중 최상이었어’를 외친다. ‘아, 이번 감기는 정말, 진짜 독해’와 함께 이번 것이 가장 힘들다고 늘 말해 온 레퍼토리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렬한 더위나 추위도 계절이 바뀌면 지난 시간의 날씨가 우리에게 안겨준 고통은 어느새 망각하고 만다.
며칠 가을답지 않게 갑자기 날씨가 차가워졌다. 이제 곧 겨울이 오리라는 전주곡을 우리에게 들려준 셈이다. 그렇다. 정말 얼마 후면 겨울이라는 ‘익숙하고도 새로운 계절’을 맞게 된다. 춥다고 해 봐야 아직은 영상의 기온인데 ‘반짝 추위’라고 호들갑스럽게 예보하는 걸 보며 겨울로 가는 길목이니 추운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겨울 날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는 지구촌의 기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뉴스로 확인했다. 곳곳에서 한 마을을 통째로 날려 버리는 강풍과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폭우, 섭씨 50도에 가까운 폭염,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만년설 등.
속출하는 기상이변에 따른 사고를 보면서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우리의 올겨울 추위는 어느 정도일지, 혹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맹추위가 찾아오는 건 아닐지 염려되기도 하고 눈은 또 얼마나 내릴지 걱정되기도 한다.
이제 겨울을 떠올리며 눈이 소복소복 이쁘게 내리는 영화 ‘러브스토리’의 낭만적인 광경을 떠올리기보다는, 도시의 기능조차 마비시켜 버리는 폭설을 상상하게 되는 것도 우리에게 더 이상 무리가 아니다. 하기야,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 서면 새로운 계절에는 좋은 일이 생겼으면 하는 기대와 다가오는 계절에 대한 작은 걱정은 늘 있었다. 특히 계절이 겨울로 바뀌는 때는 옷 걱정, 건강 걱정, 난방비 걱정 외에도 뭔가 다른 환경이 펼쳐지기에 일어나는 번거로운 것이 더 많은 시기이기도 하다.
한 해의 겨울로 가는 초입 11월이면 나는 언제나 부모님 생각이 난다. 이즈음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나는 것은, 어릴 적에 11월에 접어들면 두 분이 얕은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이런저런 걱정의 말씀을 하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연탄도 한 300장 들여놔야 할 텐데, 김장할 때가 다가오는데 갑자기 추위가 찾아와 무랑 배추랑 김장 채소 값이 비싸지면 어쩌나, 김장하는 날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힘들어지지는 않을까, 혼자 그 많은 일을 해야 하는데 몸이 견뎌낼까….
주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고, 듣고 계시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걱정에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든지 대책을 세워 주셔야 하는데 뾰족한 수가 없었는지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슬쩍 일어나 밖으로 나가신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내가 이럴 때가 아니다’ 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조그만 장바구니를 흔들며 집을 나서셨다.
오늘 당장 김장거리를 산다기보다는 예산이라도 세우려면 무 값, 배추 값이 얼마나 하는지 시장조사가 필요했을까? 배추와 무를 좋은 놈으로 골라 사는 것, 배추 150포기와 많은 양의 무를 마당으로 옮기는 일, 다듬고 썰고 강판에 갈고 무치고 버무리고, 김장이 마무리되면 김칫독에 차곡차곡 넣는 일까지. 자그마한 여인의 몸으로 김장을 거의 혼자서 다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노동인지, 김장이 끝나면 한 이틀 꼼짝 못 하고 끙끙 앓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에어컨도 없던 시절, 선풍기와 부채로 그 무더운 여름을 보낸 탓에 어머니는 기력도 많이 약해졌을 텐데 선선한 가을바람 몇 점에 겨우 힘을 얻고는 피할 수 없는 겨울 보낼 채비를 이내 시작하셨다.
올망졸망 어린 우리가 나서서 돕는다고 해도 걸리적거린다고 “너희들은 들어가서 공부해라” 하시며 그 많은 일을 혼자 하셨던 어머니. 어머니의 건강 상태와 그 많은 월동 준비는 어머니만의 일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것임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릴 때는 그랬다 쳐도, 마당에 잔뜩 펼쳐 놓고 김장하시는 어머니 곁을 약속을 핑계로 요리조리 피하며 외출하던 젊은 날의 나를 떠올리면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가슴이 멘다. 그날의 그 약속이 정말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일이었을까.
잘 차려입고 나가는 아들을 마당에 쪼그린 채 올려다보시던 어머니의 눈빛에 ‘역시 근사하구나’ 하는 대견함이 있었을까. 아니다. ‘이 광경을 보고도 어디를 나가냐, 좀 도와주지 않고’ 하는 섭섭한 눈빛이었을 것이다. 김장하는 일이 힘에 부친 어머니는 서운한 속내를 감춘 채 일찍 들어와서 커다란 김칫독을 광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무심한 아들에 대한 섭섭함을 털어 내셨다. 그날의 그 약속이 어머니를 돕는 일만큼 중요했을까…. 나는 어머니의 눈빛을 읽고는 차려입은 옷을 벗어 던지고 어머니 곁에 털썩 주저앉아 도왔어야 했다. 물론 처음엔 손사래 치며 괜찮다 하셨겠지만, 어머니도 종내에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행복한 미소를 보이셨을 텐데.
11월이 오고 날이 쌀쌀해지면 오래전 보문동 한옥 마당에 무와 배추를 잔뜩 쌓아 놓고 혼자 앉아서 김장하시던 흐트러진 머리카락의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가슴 아픈 후회의 눈물을 훔친다. 마음이 아리다,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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