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풀’ 번역가, 이태원 참사 앞에서 “父 교통사고 즉사” 고백한 이유

김소연 2022. 11. 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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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희 번역가. 사진| tvN 방송화면 캡처

유명 영화 번역가 황석희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납득할만한 종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황석희는 지난 2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가족 잃은 자를 위한 종결’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황석희는 “‘giving them a closure’라는 표현이 있다. 직역하자면 ‘종결을 주다’라는 뜻인데 사법의 영역에선 관계 당국이 범인을 잡아 정당한 죗값을 치르게 하여 피해자, 혹은 유가족에게 일종의 ‘맺음’을 주는 것을 말한다”고 운을 뗐다.

황석희는 이어 부모님의 교통사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7년 전, 아버지는 차를 몰고 정차 후 좌회전을 하려다 좌측 내리막길에서 내려오던 차와 추돌했다. 속초 산길의 좁은 교차로였고 신호등이나 볼록 거울 따위는 없었다. 아버지의 차는 정차 후 갓 출발해 고개만 튼 상태였고 좌측에서 내려오던 차는 속도가 붙어 있었다. 추돌 후 아버지의 차는 세 바퀴나 굴러 전복됐다. 아버지는 현장에서 돌아가셨다. 즉사였다. 조수석에 있던 어머니는 오랫동안 중환자실에 누워 있어야 했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고 오히려 얼굴만 맞대면 싸우는 견원지간 같았지만 이런 식의 이별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던 장례, 그 와중에 날 가장 황당하게 한 것은 아버지에게 가해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는 거다. 상대 차량은 피해 정도가 경미했다. 부상자도 없었다. 그런데 직진 우선이라는 원칙 하나로 아버지가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황석희는 “이런 맺음은 인정할 수 없었기에 재판을 청구했고 2년을 법정에서 싸웠다. 하지만 결론은 상대방 과실과 교통부의 과실을 아주 일부 인정받았을 뿐이다. 주황색등이 깜빡이는 길이었음에도 과속과 전방주의 태만을 증명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국과수에 의뢰해도, 민간에 의뢰해도 쉽지 않았다. 차가 세 바퀴를 구르고 전복할 정도였으나 과속으로 인정되지 않았다”고 당시 답답했던 심정을 토로했다.

황석희는 부모님이 좌우를 면밀히 살피는 내용이 녹음된 블랙박스와 간판, 나무 등이 시야를 방해해 물리적으로 확인할 길 없는 정황에도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고 했다.

황석희는 “항소해도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진 못했지만 시스템이 주는 종결은 받았다”면서 “그 길 좌측의 간판과 나무가 모두 제거됐고 볼록 거울이 생겼고 내리막길엔 과속 방지턱과 과속 방지 카메라가 설치됐다. 불만스럽더라도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만큼의 종결. 그 결과를 받고서야 아버지 차를 폐차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2년이나 폐차 동의서에 서명을 못 했다. 피가 잔뜩 말라붙어 종잇장처럼 구겨진 그 차를 폐차도 하지 않고 지옥처럼 2년이나 붙들고 있었다. 도저히 폐차할 수가 없더라. 그 족쇄 같던 차를 종결을 받은 후에야 간신히 폐차했다. 그게 내겐 맺음이었다”며 “물론 마음의 상처는 맺음이 없다. 지금도 사고 차량이나 전복 차량을 보면 공황이 온다. 손이 떨리고 호흡이 가빠와서 빨리 내 차를 갓길에 세운다”고 고백했다.

황석희는 그러면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족들을 떠올리며 남긴 듯한 당부를 건넨다.

황석희는 “남겨진 자의 마음을 추스르는 것은 타인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외부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납득할 수 있는 종결을 주는 것”이라며 “원인을 명확히 밝히고, 책임을 묻고, 사후 조치를 확인시켜 주는 것. 유가족에겐 저런 시스템상의 종결이 완전한 종결이 되지 못함을 너무나도 잘 안다. 다만 그런 종결이라도 있어야 개인적인 맺음을 향한 첫걸음이라도 뗄 수 있다. 그 걸음이 평생이 걸리더라도 그 계기는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의 애도는 무용한 것은 아니겠으나 유가족에게 그리 닿지는 않는다”며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납득할 수 있는 종결이다. 지금은 책임자들이 유가족에게 앞다투어 애도와 위로를 건넬 때가 아니라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종결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때다. 그들에게 종결을 줘야 한다. 맺음하고 비로소 진정한 애도를 시작할 수 있도록 종결을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29일 핼러윈 데이를 앞두고 서울 이태원에 대규모 인파가 몰리며 충격적인 압사 참사가 발생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4일 오전 6시 기준 이태원 압사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156명(여성 101명·남성 55명), 부상자는 187명(중상 33명·경상 154명)이다.

참사 당일 경찰에 압사 사고를 우려하는 신고가 11건 들어갔음에도 교통 통제 등 행정적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책임 소재를 밝혀야 한다는 누리꾼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중대본이 지난달 30일부터 오는 5일까지 국가 애도 기간으로 선포했다.

황석희는 영화 ‘데드풀’ 시리즈, ‘서치’, 보헤미안 랩소디‘, ’스파이더맨‘ 시리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셰이프 오브 워터‘, ’히든 피겨스‘ 등 수많은 작품을 번역한 유명 번역가다.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한국적인 코드를 섞은 자연스러운 의역과 작품 속 캐릭터에 맞춘 번역으로 영화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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