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만 바람기 세다는 건 틀렸다” … 생물학 근거로 뒤집은 ‘젠더 통념’

나윤석 기자 2022. 11. 4.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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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컷 보노보(오른쪽)가 암컷 어른에게 털 고르기를 해주고 있다. 세종서적 제공

■ 차이에 관한 생각 | 프란스 드 발 지음 | 이충호 옮김 | 세종서적

‘男 - 자동차, 女 - 인형’ 선호

원숭이 실험에서도 입증

‘男 - 파랑, 女 - 분홍’ 선호는

본성 아닌 문화학습 결과

인간 생물학적 본성 추적

“성역할 고정관념 틀렸고

성차이 부정해서도 안돼”

네덜란드 출신 프란스 드 발은 침팬지와 보노보를 통해 인간 본성을 탐구한 영장류학자다. ‘침팬지 폴리틱스’ ‘내 안의 유인원’ 등이 그의 대표 저서. 이전까지 동물학자들은 주로 침팬지에 주목해 인간의 진화적 기원을 설명했으나 드 발이 보노보를 ‘발견’하면서 진화 패러다임에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침팬지 사회는 공격적이고 수컷이 지배하는 반면, 보노보 사회는 평화적이고 섹스를 좋아하며 암컷이 지배한다. 드 발은 인간과 두 영장류의 비교를 통해 우리에겐 공격적 투쟁심뿐 아니라 사랑과 이타성이라는 양면이 존재하며, 이는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한 본성임을 밝혀냈다. 그의 신작 ‘차이에 관한 생각’은 인간-침팬지-보노보의 트라이앵글 구도를 ‘젠더’의 렌즈로 살핀다. “젠더는 사회문화적 학습의 산물”이라며 생물학적 성차(性差)를 외면하는 현대 페미니즘, “수컷의 바람기는 선택적 적응 과정을 거친 진화의 결과”라는 엉터리 진화론 모두와 선을 그은 채 풍부한 영장류 연구로 젠더를 둘러싼 오해를 바로잡는다.

책은 우선 성별에 따른 ‘장난감 선호’가 다른 영장류와 공유하는 본성이라고 말한다. 한 연구진은 여러 원숭이에게 경찰차와 공, 봉제 인형 같은 장난감을 던져주고 각자 어떤 것을 선택하는지 관찰했다. 수컷들은 대부분 경찰차와 공을 가져와 놀았다. 반면 암컷들은 인형에 관심을 보이며 인형을 꼭 껴안거나 생식기 부분을 자세히 살펴봤다. 이런 양상은 생후 18개월 아기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남자아이는 자동차, 여자아이는 인형으로 선호도가 뚜렷이 갈린 것이다. 여자아이가 인형을 갖고 노는 모습은 새끼에 특별한 애착을 보이는 어미를 연상시키지만, ‘돌봄과 양육 유전자’가 암컷에게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먹이를 나누고 보호하는 수컷 역시 ‘양육의 협동자’라는 사실이 수많은 연구를 통해 입증됐다. 저자는 “성차가 있는 장난감 선호도를 ‘수컷=사냥, 암컷=양육’이라는 젠더 고정관념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한쪽 성으로 태어났으나 다른 성에 속한다고 느끼는 트랜스젠더의 존재에 관한 뇌과학 연구 역시 젠더를 사회적 구성물로 보는 이론을 뒤집는다. 수술 요법으로 성전환한 트랜스섹슈얼과 달리 트랜스젠더는 ‘남성 생식기와 여성 정체성’ 혹은 ‘여성 생식기와 남성 정체성’을 보유한 존재다. ‘종말줄 침대핵’이라는 뇌 영역은 남성이 여성보다 두 배쯤 큰데, 남성으로 태어난 ‘트랜스젠더 여성’의 종말줄 침대핵이 여성의 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성으로 태어난 ‘트랜스젠더 남성’은 남성과 비슷한 크기의 종말줄 침대핵을 갖고 있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뇌과학자들은 “임신 직후 몇 개월에 걸쳐 분화하는 생식기와 달리 뇌는 후반기에 분화한다”며 “이 연결이 끊어지면 뇌는 한쪽 젠더를 취하고, 몸은 반대쪽 젠더를 취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젠더는 ‘본성’이 아닌 ‘양육’에 달렸다는 주장은 틀렸다. 부모가 처벌해도 아이의 성 정체성은 완강하게 발달한다. 젠더를 만드는 건 환경이 아닌 아이 자신이다.”

책은 암컷이 성행위에 관한 한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 객체’라는 통념도 반박한다. ‘진화생물학의 아버지’ 찰스 다윈은 이미 오래전 암컷의 주체성을 강조했으나 그의 견해는 100년 넘게 무시됐다. 여성을 남성의 병졸(兵卒)에 불과한 존재로 바라보는 가부장제 프레임이 수컷의 바람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진화론을 왜곡한 결과다. 저자는 무리 지도자인 ‘알파 수컷’ 몰래 매력적인 수컷에 접근하는 암컷 영장류 사례, 여성과 남성의 성욕은 큰 차이가 없다는 연구를 언급하며 “수컷이 암컷보다 성적으로 난잡하다는 미신을 버릴 때가 됐다”고 꼬집는다. 추천사를 쓴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말처럼 책은 “생물학이 전통적 젠더 관념을 옹호한다는 통념을 통쾌하게 뒤집는다.”

영장류와 인간 사회를 오가며 생물학적 본성을 추적하는 책이 ‘문화’의 영향을 간과하는 건 아니다. 장난감 선호와 달리 남자는 파란색을, 여성은 분홍색을 좋아하는 경향은 문화적 학습의 결과라며 “모든 일에는 유전자와 환경 의 상호 작용이 반영돼 있다”고 말한다. 다만 저자는 성차가 없으면 더 나은 세상이 되리라는 기대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잘못된 이해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을 짚는다. 문제는 성 자체가 아니라 모든 성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 편견과 불평등이라는 것이다. 성차를 가르는 유전자가 새겨진 몸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 알려준다. 우리 몸에서 도망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이다. 568쪽, 2만2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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