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각따각, 발밑 소리가 울린다…몸의 감각 깨우는 ‘이우환’

노형석 2022. 11. 4. 07: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도쿄 이우환 회고전 현장
돌과 철판, 유리의 만남을 통해 관계란 화두를 이야기한 이우환의 대표적 설치작품 <관계항>. 초창기인 1968년 만든 작품이 일본 국립신미술관에 나왔다.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 소장품이다. 도쿄 국립신미술관 제공

따각따각… 쿵쿵쿵… 뽀드득뽀드득….

바닥 밟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크게 울려 퍼진다. 전시장의 관객들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지만, 그럴수록 소리는 더욱 크게 울린다. 마침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있어 무심코 열고 나간다. 푸른 하늘과 대도시의 스카이라인이 휙 빨려들어오는 금속제 아치가 우뚝하게 서 있다. 머릿속엔 아직도 조금 전 울린 발소리들이 산사의 물소리처럼 명징하다.

지난 8월부터 일본 도쿄 롯폰기의 국립신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술 거장 이우환(86)의 일본 첫 회고전 ‘이우환’의 풍경은 허를 찔렀다. 점 찍고 선 긋고 철판과 돌덩이 놓는, 유명한 그의 작품들이 줄줄이 나왔지만, 관객들에게 다가온 감상의 초점은 바로 바닥의 소리였다. 작가로서 터전을 일군 일본에서 처음 자신의 60여년 화력을 갈무리하는 이 자리를 직접 꾸리면서 전시장 바닥을 자갈돌, 얇은 박석, 아크릴판 등으로 다양하게 깔았다. 관객들은 작품을 단지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위와 주변을 직접 걸으면서 작가, 공간, 자연, 작품과 교감하고 있다는 것을 울리는 소리로 실감할 수 있었다.

밟으면 소리나는 박석을 바닥에 깐 설치작품 <관계항―서처>. 도쿄 국립신미술관 제공

작가가 된 지 60년을 훌쩍 넘긴 이우환은 공히 세계 미술계에서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인정받는다. 돌덩이와 철판의 작가, 혹은 일필일획의 점과 선을 찍고 구사하는 작가로 세간에 알려졌지만, 일반인은 물론 미술인도 일견 무미건조한 화풍처럼 보이는 그의 작품들이 왜 거장성을 지녔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국립신미술관의 전시는 이런 ‘패러다임 시프트’를 이룩한 이우환의 저력 혹은 괴력이 어떤 경로로 태동하고 전개돼나갔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그의 거장성에 분명한 명분과 맥락이 있음을 몸의 감각을 통해 느끼게 해준다.

이우환은 서구를 중심으로 움직여온 회화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인물이다. 닮게 그리는 ‘재현’과 작품 재료의 ‘표면’과 ‘물성’에 집착해온 서구 미술사의 통설적 개념을 그는 1960년대 이후 일본의 전위 예술사조였던 모노하(物派) 운동을 주도하면서 뒤집어버린다. 인공과 자연, 자연과 인간의 관계 같은 철학적 화두를 자연의 돌과 인공의 철판·유리판이 대면하는 조형적 공간과 인위적이면서도 자연적 본능을 함축한 붓질이 찍고 그은 점과 선의 화폭으로 풀어내면서 미술 형식의 혁신을 일으켰다. 이는 기본적으로 동아시아 특유의 선불교에서 비롯한 선적 세계관에서 상당한 자양분을 취한 것이었다.

3개의 거대한 화폭에 산업용 도료를 써서 진홍, 주홍, 주황 등 색채가 불균질하게 화면 전면에 번져나가는 색채 추상화를 만든 1968년의 구작에서 이미 그런 전조를 읽게 된다. 들머리 첫 전시장에 내걸린 작품들이다. 얼핏 마크 로스코의 색채 추상 같지만, 인공적인 산업 재료로 하얀 화폭, 작가의 마음, 감성과 서로 접촉하고 부딪히는 과정을 그대로 풀어내면서 이후 이어질 철판과 돌덩이의 만남과 점과 선, 색조와 화면의 만남을 예지적으로 드러낸다.

<관계항―거울의 길>. 도쿄 국립신미술관 제공

여러 자연석과 다양한 표면 질감을 지닌 철판을 대면시키거나 유리판이나 철판 위에 돌덩이를 놓고 깨지거나 짓눌린 접점을 보여주는 <관계항> 연작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이런 콘셉트를 처음 구상한 초창기인 1968년 소박한 규모와 느낌으로 만든 일본 모리미술관 소장품이 나와 눈길을 모은다. 우주와 자연, 인간, 사물의 관계와 기운을 형상화하는 노력들은 이후 1970년대 쇠막대와 나무막대, 전구와 돌덩이, 기하학적 도형 등을 응용한 작업들로 가지를 쳐나가는데, 현상학적 질문에 바탕한 그의 작품들이 어떤 경로로 형성되고 발전해나갔는지 확인시켜준다.

전시의 알짬 중 하나가 바로 야외공간의 <관계항―아치>와 이 작품 직전 만나는 바닥의 설치 공간 <관계항―서처(棲處)>(2017)다. 따박따박 탁탁 소리가 관객 발걸음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균일하지 않게 배치된 바닥 박석들이 어긋나면서 투둑 탁탁 소리를 내는 것. 이런 바닥이 설치된 사각형 공간 양 측면의 한쪽엔 수평으로 박석을 쌓고, 다른 한쪽엔 수직으로 편석을 세워 쌓아 수평과 수직 축의 대비도 볼 수 있게 했다. 온통 자갈을 깔고 유리판으로 된 길쭉한 금속판을 놓고 그 중간에 돌덩이 2개를 놓은 <관계항>의 다른 연작도 걸으면서 자신의 자태를 보고 소리를 함께 음미하는 공감각적 감상 체험을 선사한다. 이어지는 야외 설치공간의 아치 작품에서는 인근 미드타워의 고층빌딩이 숲과 함께 눈에 들어와 도시 공간에 대한 색다른 정화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우환 작가가 지난 2014년 6월 프랑스 베르사유 초대전 공식 개막행사에서 베르사유궁 본관 앞에 세운 무지개 아치 아래 서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 일본 국립신미술관 전시에는 8년 전 베르사유에 설치했던 하늘과 땅을 조망하는 아치의 또 다른 버전이 나와 도쿄 도심의 빌딩과 하늘을 굽어보고 있다. 노형석 기자

사실 이 아치 작품은 과거에 이미 실현된 바 있다. 작가는 지난 2014년 6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초대전 당시 궁전 본관 앞에서 정원을 굽어보는 거대한 무지개형 아치를 세웠다. 당시 공식 개막행사에서 그는 무지개 아치 아래를 앞장서 거닐면서 이 작품이 지닌, 자의식을 넘어서는 관계성의 초월적 성격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이번 전시에는 바로 8년 전 베르사유에 설치했던 하늘, 땅을 조망하는 아치의 또 다른 버전이 나와 도쿄 도심의 빌딩과 하늘을 굽어본다. 눈에 보이는 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감각을 열고 들락날락하는 소통의 기운을 강조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국립신미술관 전시장에 나온 작가의 1978년작 <점으로부터>. 작가 소장품. 도쿄 국립신미술관 제공

전시 후반부는 1970~90년대 점, 선, 바람 연작과 이후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응답> <대화> 연작으로 대변되는 색층의 축적으로 이뤄진 점과 획의 그림들이 채운다. 이우환만의 특징을 지닌 작품들이지만, 궁금증도 남는다. 일필일획의 선적인 세계를 표출했던 그의 과거 점선 연작에서 왜 최근 그의 점선은 아름답고 어여쁘고 고혹적인 색층의 겹침으로 탈바꿈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미학적, 철학적 맥락을 짐작할 수 있는 구성이나 설명은 별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다.

이번 전시는 오는 7일 끝나지만, 후속 순회전이 다음달 13일부터 내년 2월12일까지 일본 간사이 지방의 고베시 효고현립미술관에서 열린다.

일본 국립신미술관 개관 15주년 기념 전시회로 기획된 회고전 ‘이우환’의 포스터. 도쿄 국립신미술관 제공

도쿄/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