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새 “온라인이 삶 깊숙이 침투한 현실, 부조리극에 담아”

임석규 2022. 11. 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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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이란 제목에서 '서쪽 끝 산티아고 순례길'이 어른거린다.

스페인 800㎞ 산티아고 순례길이 깨침과 구원을 향한다면, 러시아 시베리아 콜리마대로 2200㎞는 무엇을 위한 길인가.

"현실을 비현실로 비틀어 상상하는 작가에게 애초에 비틀린 현실이 주어졌을 때 무엇을 써내려갈 수 있었을까요." 정진새는 "온라인이 삶의 영역 깊숙이 침투한 현실을 연극적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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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쓰고 연출
국립극단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공동으로 제작한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은 현실과 비현실이 흐릿한 이 시대에 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국립극단 제공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이란 제목에서 ‘서쪽 끝 산티아고 순례길’이 어른거린다. 스페인 800㎞ 산티아고 순례길이 깨침과 구원을 향한다면, 러시아 시베리아 콜리마대로 2200㎞는 무엇을 위한 길인가. 국립극단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공동 제작한 이 연극은 답을 내놓는 대신, 끝없이 질문을 남발한다.

무대는 시베리아와 접한 오호츠크해상의 기후탐사선 위성분석 레이더실. 이곳의 두 연구원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의 반대로 향해 시베리아를 걷는 ‘그’가 레이더망에서 포착된다. 그의 행로는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온라인 게임에서도 ‘시베리아 순례길’이 관광상품으로 등장한다. 두 연구원의 대화 속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엉키고 섞이며, 현실과 가상은 점점 구분이 모호해진다.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은 줄거리를 따라 서사적 흐름을 쫓다 보면 길을 잃기 십상인 작품이다. 논리와 인과 대신 비약과 혼돈이 넘실거리는 실험적 연극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쓰고 연출한 정진새는 지난해 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을 받는 등 탄탄한 스토리로 주목받았다. 지난 2일 기자들과 만난 그는 “언어나 상황이 따로 노는 부조리극을 쓰게 됐다”며 이 작품이 일종의 ‘부조리 연극’임을 고백했다.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의 대본을 쓰고 연출한 정진새. 국립극단 제공

희미한 불빛의 깜박거림으로 시작하는 이 연극에서 빛의 명멸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무대 위의 레이더는 뭔가를 포착하려는 듯 집요하게 점멸하며 사방을 훑고 더듬는다. 50차례 이상 반복되는 암전은 이 효과를 극대화하는 장치. “점점 흐릿해지고 희미해져가는 세상, 모호하고 어렴풋하며 선명하지 않은 세계를 증언하려는 장치죠.” 연출자의 설명이다.

이 불명확한 세상에 대해 작품 속 연구원은 이렇게 읊조린다. “세상이 깜박거리는데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어. 지금은 정체성의 위기가 아니라, 비현실의 위기야.” 정진새는 “이 세계가 이렇게 흐릿해지고 있는데 자명한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 게 과연 맞는가 의문이 든다”고 했다.

작품의 실험성은 태생부터 예고돼 있었다. 2020년 아시아문화전당이 스토리를 공모하며 제시한 주제어가 ‘온라인 여행’이었다. 여행다운 여행이 어려웠던 팬데믹 시절, 현실에서 이루기 어려운 ‘상상 속 온라인 여행’이 열쇳말로 주어졌던 것. “현실을 비현실로 비틀어 상상하는 작가에게 애초에 비틀린 현실이 주어졌을 때 무엇을 써내려갈 수 있었을까요.” 정진새는 “온라인이 삶의 영역 깊숙이 침투한 현실을 연극적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고 말했다.

‘2인극’에 가까운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은 어딘지 어둡고 허무한 분위기를 풍긴다. 국립극단 제공

마침내 동쪽 끝에 다다른 순례자. 우주로부터 불어온 바람인 오로라를 바라보며 기도한다. “죽고 싶진 않지만, 살아 있다는 것의 허전함을 그만 느끼고 싶다”고. 사실상 ‘2인극’에 가까운 이 연극은 어딘지 어둡고 허무한 분위기를 풍긴다. 많은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 분리된 시간, 단절된 공간, 비약하는 장면들 탓에 그게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정진새는 “방향과 경로와 방법을 의심하면서 이 희곡이란 지도를 살폈다”며 “부디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여행을 즐겨달라”고 당부했다.

지난달 20~23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먼저 관객을 만난 이 연극은 오는 27일까지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이어진다. 배우 이은정, 정슬기, 전선우가 출연한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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