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 5억 달러 영구채 콜옵션 연기…기업 달러채 발행 비상등
[비즈니스 포커스]
흥국생명이 2017년 발행한 5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영구채)의 조기 상환권(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기로 하면서 후폭풍이 커지고 있다. 한국 기업이 발행한 신종자본증권이 조기 상환에 실패한 것은 2009년 우리은행 이후 처음이다.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로 한국 채권 시장이 얼어붙은 데 이어 외화채 발행까지 위축되면 기업들이 유동성을 확보할 통로가 완전히 막힐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차환 발행 실패로 5억 달러의 신종자본증권 조기 상환 연기
11월 2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흥국생명은 11월 1일 싱가포르거래소를 통해 11월 9일 예정된 5억 달러어치의 신종자본증권의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시했다. 한국 기업이 발행한 자본성 증권(영구채·후순위채)이 조기 상환되지 않는 것은 2009년 우리은행 외화 후순위채 이후 처음이다.
흥국생명은 지난 9월 이사회를 열고 콜옵션에 대비해 5억 달러의 자금 조달을 위한 영구채 발행을 추진했다. 통상 자본성 증권은 약 5년 뒤 발행사가 채권을 되사주기로 하는 조기 상환 조건이 붙는다. 하지만 금리 인상 등의 여파로 새 외화 영구채 발행이 어려워지면서 조기 상환도 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차환 발행 없이 기존 영구채를 조기 상환하면 재무 건전성 지표인 지급 여력(RBC) 비율이 하락하기 때문이다. 지난 2분기 기준 흥국생명의 RBC 비율은 금융 당국 권고치(150%)를 소폭 웃도는 157.9%(2분기 기준)다.
흥국생명이 조기 상환을 포기하면서 해당 영구채 금리는 2017년 발행 당시인 연 4.475%에서 연 6.7%대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조기 상환하지 않으면 가산 금리가 적용되는 ‘스텝업(step up)’ 조항 때문이다.
이번 영구채는 6개월마다 콜옵션을 행사할 수 있다. 흥국생명은 이에 따라 6개월 혹은 1년 뒤 반드시 조기 상환할 계획이다. 하지만 6개월 뒤 이번과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시장의 우려다.
엄밀히 말해 영구채 콜옵션 미행사는 디폴트(채무 불이행)는 아니다. 실제 미국이나 유럽은 경제적인 이유로 신종자본증권 콜 행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 편이다. 펀더멘털에 문제가 있지 않는 이상 신종자본증권 조기 행사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최근에는 크게 이슈화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근 레고랜드 사태로 한국 크레딧 시장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번 콜 미행사로 시장의 충격은 다른 시기에 비해 그 여파가 클 수 있다. 금융 투자업계에 따르면 내년 만기가 돌아오는 한국 기업들의 외화채권 규모가 약 250억 달러(약 35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로 한국 기업이 발행한 외화채에 대한 신뢰가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조기 상환은 투자자 신뢰와 직결된 요소다. 투자자들은 발행사가 조기 상환권을 행사할 것이란 전제 아래 영구채를 매수한다. 영구채가 ‘사실상 5년 만기 채권’으로 인식되는 배경이다. 발행사가 영구채를 조기 상환하지 않으면 재무 상태가 어렵다는 신호를 시장에 줄 수 있다. 투자자들이 채권을 던지면서 흥국생명의 영구 외화채 가격도 출렁이고 있다. 99달러 선에서 거래되던 영구채는 이날 한때 82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외화 조달을 준비 중인 기업들도 줄줄이 비상이 걸렸다. 외화 채권 발행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흥국생명이 영구채 조기 상환에 실패하자 달러 자금 조달을 준비하던 한국투자증권 역시 외화 채권 발행 계획을 전면 철회했다. 하나은행과 신한은행은 캥거루본드(호주 달러 표시 채권) 발행을 추진 중이지만 투자자 모집에 난항을 겪고 있다.
다른 보험사들도 달러 신종자본증권 발행에 어려움을 겪거나 더 높은 금리를 제공할 가능성이 이전보다 높아졌다. 한화생명과 KDB생명은 내년 4월과 5월에 각각 10억 달러, 2억 달러의 달러 신종자본증권 조기 상환일이 도래한다. 달러 은행신종자본증권이나 KP물 발행에도 부정적인 여파가 이어질 수 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고강도 긴축 속에 위험 회피 심리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3연임으로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크레딧에 대한 우려로 한국 KP물로 최근 크레딧 스프레드가 확대되는 등 시장 여건이 좋지 못한 상황이다.
유승우 DB금융증권 연구원은 “이번 사례는 금융 시장이 경색돼 차환 발행이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조기 상환이 어렵다는 점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며 “은행 등 다른 신종자본증권은 양호한 재무 건전성을 보유하고 있어 조기 상환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고 판단되지만 암묵적인 조기 상환 책임에 대한 금기가 깨진 만큼 당분간 투자 심리가 약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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