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하락기에 지분 늘리는 기관투자자...폐쇄경영 유통 오너家 ‘긴장’
주식 하락하며 기관 투자자, 주요 주주 잇딴 등극
트러스톤·VIP, 한국알콜·디지털대성 등 2대 주주로
“주주 무시 경영 바뀌어야...국민연금이 해야 했던 역할”
1967년 설립된 속옷 제조회사 BYC가 트러스톤자산운용(트러스톤)을 2대 주주를 맞이한 후 창립 이래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트러스톤은 BYC가 오너일가 간 부적절한 내부거래를 묵인했다며 이사회 의사록 열람을 요구한 데 이어 회계장부까지 들여다 보겠다고 나섰다.
작년 말부터 국내 주식이 하락기에 접어들자 국내외 기관 투자자들이 주요 주주로 이름을 올린 사례가 많아지면서 대주주들은 부쩍 긴장하는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국내 상장사가 주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데 인색했던 만큼 이런 변화를 환영할만 하다고 입을 모았다.
트러스톤은 지난달 31일 “지난 6일 BYC 이사회 의사록을 열람해 자료 분석을 한 결과 2016년 1월부터 2022년 5월까지 진행한 대주주 일가 특수 관계기업과의 내부거래 가운데 대부분이 상법이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며 상법에 따른 회계장부 열람을 요청하는 주주 서한을 보냈다고 밝혔다.
BYC는 고(故) 한영대 전 회장이 창업했을 당시만 해도 속옷 제조에 주력하는 회사였으나 이제는 건설·분양·임대 전문 회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 상반기 의류 관련 영업이익이 26억원이었는데 건설·분양·임대는 76억원에 달했다.
BYC와의 내부거래가 상당한 회사는 지주사 역할을 하는 신한에디피스와 제원기업, 비와이씨마트, 신한방, 백양이다.
이 회사들 모두 한 전 회장 자녀와 손주들이 지분 100%를 가지고 있으며 임대·분양, 건물 관리 용역 등 부동산업을 영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BYC 소유 건물은 전국 40여개로 공정가치는 1조1613억원에 이른다. BYC와 계열회사들은 이 건물을 나눠서 소유하면서 BYC 매장을 열어 제품을 판매하거나 오피스텔이나 오피스 등으로 분양·임대해 돈을 벌고 있다. 이중 계열사 간 자금이 오가는 거래도 상당하다.
예를 들어 신한에디피스는 보유한 건물에 BYC 매장을 열고 의류, 속옷, 잡화를 파는데 작년 BYC에서 속옷 등 상품 20억원 어치를 사서 신한방에 19억3000만원 규모를 팔았다.
신한에디피스는 신한방에서 임차보증금 30억원을 받고 제원기업, 남호섬유, 신한봉제 등에게는 임차보증금을 내는 등 계열사 간 건물을 빌리고 빌려주며 얽혀있다.
트러스톤이 BYC 주주 명단에 등장한 것은 작년 2월이다. BYC 주식 3만6186주를 매입하며 지분율 5.79%를 보유한 주요 주주가 됐을 때까지만 해도 보유 목적은 ‘일반투자’였다.
트러스톤은 지분율이 8.13%로 늘어난 작년 12월 보유목적을 ‘경영참가’로 변경했다. 지분율은 관계사인 신한에디피스(18.43%), 한승홀딩스(10.55%) 다음으로 많다.
트러스톤은 경영참가를 선언한 이후 편법 내부거래 여부를 확인하겠다며 법원 승인을 받아 회사 이사회 의사록을 열람했고 계열사 간 거래 상당수가 사전 승인·보고 절차 없이 위법하게 진행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에 실질적인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회사 측에 회계장부 열람을 요청했다.
이성원 트러스톤 부사장은 “BYC의 지배구조에 문제가 많고 앞으로 주주 제안을 통해 지배구조를 개선하면 주가가 올라갈 여지가 있다고 판단해 투자하게 됐다”며 “BYC는 보유한 부동산 시가가 2조원이 넘지만 시가총액은 3000억원도 되지 않으며 내부거래를 통해 회사에 돌아갈 이익이 오너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 트러스톤·VIP, 한국알콜·디지털대성 등 주요 주주로… “미국만큼 주주제안 활발해져야”
재계에선 제2의 BYC가 얼마든지 더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작년 말부터 국내 주식시장이 침체된 사이 국내외 기관 투자자가 주요 주주로 껑충 뛰어오른 회사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분 매입 이유를 ‘단순투자’라고 밝히고 있지만 트러스톤처럼 ‘경영참가’로 바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트러스톤은 지난 9월 페인트, 도료, 잉크 등에 사용되는 착향료 초산 에틸을 생산하는 한국알콜 주식 111만1558주(지분율 5.14%)를 매입하며 2대 주주가 됐다.
한국알콜은 1984년 사업을 시작한 뒤 창업주 지용석 회장이 과반 지분을 확보한 회사 KC&A를 통해 지분 33.49%를, 본인의 직접 지분 5.09%으로 지배하고 있다.
한국알콜 역시 초산 에틸, 화공약품을 판매하는 KC&A와 관계사인 이엔에프테크놀로지, 진솔원 등과의 내부거래가 상당하다.
KC&A는 작년 연 매출 7100억원을 냈는데 한국알콜과의 내부거래를 통해 발생한 매출이 2800억원에 달한다. 다만 트러스톤은 “한국알콜의 경우 행동주의 전략을 추구하는 펀드에서 투자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VIP자산운용은 아시아시멘트 등을 거느린 지주사 아세아의 지분을 꾸준히 확대해 2대 주주에 오른 뒤 오너일가에게 지나치게 높은 배당을 하는 등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요인을 시정하라고 요구했다. 아세아는 지난달 말 이사회를 열고 사상 첫 분기 배당을 결의했다.
VIP자산운용은 또다른 투자사 디지털대성의 2대 주주로도 최근 이름을 올렸다. 주식 191만2845주(지분율 6.42%)를 보유해 대성출판(10.08%)과 강남대성학원(7.43%) 등 관계사를 제외하고 실질적인 2대 주주다.
디지털대성은 재수학원인 대성학원을 설립해 이른바 ‘학원 재벌’이 된 고(故) 김만기 창업주의 아들 김인규 부회장, 손자 김대연 부사장이 임원으로 재직하면서 주식도 일부 보유하고 있다. 지분율 50%에 달하는 특수관계자들이 작년 123억원 규모의 배당 절반을 가져갔다.
김민국 VIP자산운용 대표는 “(주주가치 제고에 활용할 만한) 현금이 있거나 현금 흐름이 일정한데 단기적으로 큰 지출이 필요하지 않거나, 혹은 대주주가 의지는 있지만 주가를 부양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판단하는 경우 적극적인 목소리를 낸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최소 3~5년 간 투자를 해 와 대주주 측과 신뢰관계가 있고 회사 사업모델과 현금 흐름 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확률적으로 (주주 제안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는 “지금 국내 상장사는 철옹성을 쌓아놓고 주주 무시 경영을 하고 있다”며 “정당한 절차에 따른 주주 제안을 통해 대주주가 일정수준 긴장감을 갖고 경영에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연금이 해야 되는 역할을 국내 자산운용사가 하고 있는 것”이라며 “미국은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S&P500 기업에 다 투자하면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고 우리나라도 모든 대기업에 이런 주주 제안이 활발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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