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핫플] 1100년 고목 ‘용문사 은행나무’…황금빛 만추를 선사하다

이문수 2022. 11. 4.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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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핫플 (11) 경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나무높이 42m·둘레 14m ‘동양 최대 규모’
천년의 웅장함에 보는 순간 할말 잃고 응시
영욕의 역사 지켜본 나무 앞에선 숙연·겸손
마의태자·의상대사 등 여러 탄생설화 전해져
강인한 생명력 과시…한해 열매 350㎏ 생산
 

단풍이 절정인 경기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수령 1100년, 높이 42m로 동양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다.


“난 나무 같은 사람이 될 거야.”

고목을 볼 때면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한 소꿉동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당시 ‘장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는 뜻으로 던진 질문에 동문서답하는 듯하여 비웃어버렸다. 헌데 어른이 된 지금 그의 짧은 한마디가 종종 마음속 큰 울림이 되어 돌아온다. 아무런 조건 없이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고, 땔감이며 열매며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이 나무 아닌가. 가을이 바투 다가온 이때 경기 양평 용문사로 향했다. 그곳에는 1000년 나이테를 지며리 그려온 은행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다.

세상을 깨우는 햇귀의 황금빛을 머금은 듯하다. 어쩌면 초등학생 조카의 노란 우산을 절반가량 접어놓은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황금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키스> 속 연인이 잠들어 있을까.

양평읍에서 동북방향으로 약 15㎞가량 떨어진 용문사 앞 은행나무의 첫인상이다. 거목의 웅장함에 누구라도 할말을 잃고 오랫동안 응시하게 된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같은 수종 가운데 키가 가장 크다. 높이 42m에 이르는 노란색 나무가 새파란 가을 하늘과 맞닿아 있어 아찔할 정도로 극명한 색상 대비를 이룬다. 나무 둘레는 14m, 수관 폭은 28m에 달한다. 수관 폭은 위에서 원뿔 형태로 보이는 나무를 내려다봤을 때 지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나이는 1100년 정도 됐을 겁니다. 높이·둘레·수관 폭을 고려했을 때 국내를 넘어 동양 최대 규모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한국전쟁 때 전사한 국군 제6사단 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세운 용문산지구전적비. 용문사 오른쪽에 있다.


길 앞잡이가 되어 준 구희석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에 숙연해진다. 1000년 세월 이 땅 위 영욕의 역사를 말없이 내려다봤을 이 신성한 나무 앞에 100년 살기도 어려운 인간은 초라하고 비루하게 보일밖에!
은행나무는 특성상 자연 번식이 어렵다. 그래서 누군가 심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 나무의 탄생 설화에 두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명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다.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향하던 길에 태자가 심은 것이란다.

또 다른 한명은 통일신라 왕족 출신의 고승 의상대사다. 이곳에 온 그가 자신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놨는데 훗날 은행나무가 됐다는 이야기다.

경순왕 재위기간(927년∼935년), 의상대사 출생일(625년)을 고려해보건대 짧게는 1100년, 길게는 1400여년까지 수령을 계산해볼 수 있다.

구희석 해설사는 경순왕 쪽에 무게를 둔다. “일설에는 경순왕이 이곳에 친히 행차해 창사했다고 하거든요. 지금도 기관장 등이 행사 때 건물 앞에서 기념식수를 심잖아요. 아마도 경순왕도 절이 세워진 것을 축하하고자 나무를 심지 않았을까 하는 거죠.”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별칭이 있다. 공룡이 살았던 고생대부터 지금까지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1000살이 훌쩍 넘은 할머니 나무이건만 자손을 퍼뜨리려는 욕망은 여전히 활화산이다. 한해 생산해내는 열매만도 350㎏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럼 남편이 될 나무는 어디 있단 말인가. 과학적으로 반경 4㎞ 이내 암수가 함께 있으면 수정이 가능하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절 앞에 있지만 기실 은행나무는 불교만 아니라 유교·도교와도 관계가 밀접하다. <장자> 어부편에는 “공자가 수림 사이에서 유유히 거닐다 행단에 앉아 쉬었다. 제자는 책을 읽고 공자는 시를 읊으며 고금을 연주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행단은 ‘은행나무 단’을 말하는 것으로 은행나무가 식재된 곳이 유학자를 위한 강학의 공간으로 쓰였음을 말해준다.

은행나무는 전세계에서 유일한 1속1종 식물이다. 억겁의 시간 여러 종으로 분화되지 않았거나, 분화된 종이 사라졌을 것이라는 유추가 나온다. 진화가 더딘 게으름뱅이일 수도 있고, 강인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보짱 큰 식물일 수도 있다. 수억년간 한가지 종으로서 지조를 지켜온 은행나무 앞에서 사유의 시간이 길어진다. 상대방에 따라, 상황에 따라 태도와 말을 바꾸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목표를 달성하려 거짓말도 불사한다. 세상은 그들을 ‘처세술에 능하다’며 칭송한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으랴. 소싯적 어울렸던 소꿉친구를 우연히 다시 만난다면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천년의 은행나무 같은 사람이 되겠노라고!

양평=이문수 기자, 사진=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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