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26) 황룡몽

2022. 11. 4.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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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당에서 깜빡 잠이 든 강실댁
황룡과 합일 이룬 꿈 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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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다녀오겠습니다.”

“칠전팔기(七顚八起)!”

과거를 보러 떠나는 아들 허 초시가 큰절을 올리자 아버지 허 대감이 격려했다. 허 초시 부인 강실댁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꼭 다물고 허 초시 뒤를 따라갔다.

까치고개 마루에서 “부인, 이제 그만 돌아가시오” 하는 남편 말에 강실댁은 말없이 품 속에서 버선 세켤레를 꺼내 허 초시 단봇짐에 넣어줬다. 허 초시가 강실댁 두 손을 꼭 잡았다. 허 초시가 가물가물 보이지 않자 고갯마루 외솔을 잡고 눈물을 쏟았다.

그놈의 과거. 도승지로 한평생 임금님 곁을 지키다 낙향한 시아버지 허 대감, 정이품 승헌대부를 한 시조부, 줄줄이 과거에 합격해 궁궐로, 지방 관아로 나라 녹을 먹고 있는 친정 오라버니들. 그러나 어릴 적 서당에서 천재 소리를 듣던 신랑 허 초시는 과거만 보면 떨어지기를 일곱번이다. 강실댁은 과거 소리만 들어도 자지러졌다.

낙향한 신랑의 한숨 소리, 허 대감의 헛기침 소리, 시어머니의 곱지 않은 시선. 혼례를 올린 지 일년이 됐건만 합방을 한 것은 열 손가락에 미치지 못한다.

별당에 쓰러져 깜빡 잠이 들었나. 우르르 쾅쾅 하늘을 찢는 뇌성이 울리더니 황금 비늘을 번쩍이며 긴 수염을 늘어트린 황룡 한마리가 들창으로 들어와 강실댁을 안았다. 저고리를 벗기고 치마를 걷어 올렸다. 이윽고 합일이 이뤄졌다.

강실댁이 땀에 젖은 채 깨어났다. 너무나 생생해 허벅지를 꼬집었다. 초승달이 감나무 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꼭두새벽에 일어나 우물가에서 목간하고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빌었다. 새신랑 허 초시의 꿈을 이뤄달라고.

별당에 들어가 문을 잠그려는데 밖에서 누군가 문을 잡아당겼다. 목간을 할 때 토란밭이 흔들리더니 그쪽에 숨어 목간하는 모습을 훔쳐본 도둑이었다. 이상하게도 품속에서 뽑아낸 은장도가 저절로 방바닥에 떨어졌다. 비몽사몽간에 황룡한테 당했듯이 또다시 겁탈을 당했다. 이상한 것은 불가항력이었다는 것. 저항 한번 못해보고 하룻밤에 두번이나 교성을 질렀다.

과거 보러 한양에 간 허 초시는 강실댁의 황룡꿈과 천지신명께 빈 간절한 기도에도, 아버지 허 대감의 애끓는 격려에도 아랑곳없이 또 낙방을 하고 말았다. 그는 색향(色鄕) 평양으로 가 아예 기생집에 단봇짐을 풀어놓고 밤이고 낮이고 주색에 빠졌다. 돈이 떨어지자 기생집에서 쫓겨났다. 그길로 을밀대로 가더니 술 한잔을 마시고 대동강에 몸을 던져 한 많은 짧은 생을 마감했다.

외아들 유서를 받아든 허 대감의 상심이 하도 깊어 줄초상이 나는가 했는데,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 강실댁이 헛구역질을 하는 걸 보고 기운을 차렸다. 대(代)가 끊어진 줄 알았는데 며느리 배 속에 가문의 줄이 영글어간다는 희망이 허 대감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보약이다 닭백숙이다 바치며 허 대감은 강실댁을 보살폈다.

강실댁은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다. 허 대감은 뛸 듯이 기뻐했다. 며느리가 젖 물리는 시간을 빼면 온종일 손자를 품고 다녔다. 손자 이름을 허룡이라 지었다. 허룡이 다섯살이 되자 전복(戰服)을 입고 서당에 갔다.

세월이 흘렀다. 스무살 허룡은 알성급제를 해 임금님 곁을 지키는 승지가 됐고 할아버지 허 대감은 벌써 이승을 하직했다. 조신한 강실댁은 조용히 고향에서 종가댁을 지키고 있었다.

아들 허룡이 서른아홉살 강실댁을 한양으로 모시려 했지만 강실댁은 완강히 거절하고 고향집을 지켰다. 가끔 고향을 찾는 허룡이 제 아버지 가묘에 술을 따를 때면 강실댁 가슴이 찢어졌다.

상강(霜降)이 지나 무서리가 하얗게 내린 어느 날 새벽 관아 대문이 삐걱 열리고 삼년간의 옥살이를 마친 대도(大盜) 지석두가 수문장의 작별인사를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아직 어둠도 걷히지 않은 꼭두새벽에 관아 밖에서 장옷을 눌러쓴 여인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두부를 건네자 지석두는 깜짝 놀라며 정신없이 먹어치웠다. 정체 모를 여인을 따라 지석두가 간 곳은 허 대감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다. 지석두는 부엌에서 목간하고서 강실댁이 마련해놓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서방님, 절 받으세요.”

강실댁이 지석두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날 밤 지석두와 강실댁은 별당에서 운우의 정을 나누고 이튿날 밤 야음을 틈타 멀리멀리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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