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강간은 영장류 본성 아냐”…영장류학자가 답하다
‘성차는 타고나는가, 길러지는가’
입맛대로 말고 있는 그대로 봐야
차이에 관한 생각
영장류학자의 눈으로 본 젠더
프란스 드 발 지음, 이충호 옮김 l 세종서적 l 2만2000원
흔히 들리는 경험담. 아들에게 돌봄을 가르치고 싶어 아기 인형을 사줬더니 그걸로 칼싸움을 하더라, 반대로 딸에게 자동차를 주었더니 그걸 포대기에 정성스레 싸서 업어주고 있더라는 이야기….
‘젠더 뉴트럴’(gender neutral·성 중립적)하게 키우려 애를 썼지만, 어쩔 수 없는 지점이 있더라는 부모들의 “좌절담”은 우리에게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남자아이가 ‘싸움 놀이’를, 여자아이가 ‘엄마 놀이’를 선호하는 건 인간에게 내재한 생물학적 본능일까 아니면 양육(사회화)의 결과일까? 이를 엄밀하게 따져보려면 기본적으로 3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①다른 문화권과 비교 ②우리 조상 격인 영장류와 비교 ③갓 태어난 신생아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차이에 관한 생각> 지은이 프란스 드 발은 동물 연구를 40여년 동안 해온 영장류학자답게 ②단계에 집중한다. 우리 인간과 디엔에이(DNA)의 96%를 공유하고 있는 침팬지, 보노보 등의 행동 양식을 살펴 특정 행동 양식이나 선호가 본능인지, 양육의 결과인지 따져본다.
그 결과는 이랬다. 어린 암컷 침팬지는 “애완 암석”을 마치 새끼 다루듯 소중히 들고 다니며 밤에는 품에 꼭 안고 잠들었고, 어린 수컷 침팬지는 이 암석을 발로 차며 놀았다. 지은이는 동료 영장류학자의 연구를 인용해 “암석이나 통나무를 마치 새끼처럼 붙들고 다니는 모습은 어린 수컷보다 어린 암컷에게서 약 3~4배가량 더 많이 관찰됐다”는 점을 소개한다. 이와 더불어 다양한 문화권의 연구, 생후 9일 차 신생아를 대상으로 진행된 실험 결과를 종합해 “암컷이 새끼를 돌보려 하는 것은 포유류의 특성”이라고 추론한다.
이러한 결론이 어떤 이에게는 달갑지 않을 것이다. 양육이 여성(암컷)의 생물학적 본능처럼 인식되면 이를 여성이 훨씬 더 많이 떠맡고 있는 현실이 자연스럽고, 때로 정당해 보이기까지 할 가능성이 있어서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러한 ‘가치 판단’ 때문에 ‘차이’를 직면하지 않으려 하는 태도는 문제라고 꼬집는다. “과학이 하는 일이 우리의 편향을 확인하는 문제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연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치 판단을 ‘배척’하는 지은이의 엄격한 직업윤리 덕에 독자는 ‘성차의 재발견’이라 할 만한 새로운 사실을 접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수컷의 강간은 ‘본능’이고, 가부장제는 ‘자연의 섭리’라는 오래된 통념이다. 이 그릇된 인식은 100여년 전 영국에서 진행된 망토개코원숭이 연구에 기대고 있다. 주커먼이라는 동물 해부학자가 한 동물원에 원숭이 100마리를 풀어놓았더니 수컷은 소수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유혈극을 벌였고, 암컷은 ‘전리품’이 되어 쉴 새 없이 강압적 교미에 시달리다 죽는 참혹한 결과가 빚어졌다. 주커먼은 이를 토대로 “수컷은 본질적으로 우월하고 폭력적이며, 암컷은 발언권이 없고 오로지 수컷을 위해 존재한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 실험이 전형적인 ‘입맛대로’ 연구였다고 지적한다. 일단 망토개코원숭이는 우리와 “너무 멀다”. 유전적으로 인간은 꼬리가 없는 것이 특징인 ‘작은호미니드과’에 속하는데, 망토개코원숭이는 꼬리가 있는 원숭이과다. 심지어 같은 망토개코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다른 연구에서는 전혀 다른 결론이 도출된 적도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갈등을 회피했고, 암컷의 선호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특정 수컷에 대한 암컷의 선호가 뚜렷하다면, 다른 수컷이 둘 사이에 폭력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지은이는 주커먼의 실험은 암컷·수컷 간 선호가 형성될 시간 없이 진행돼 이례적으로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수컷의 강간은 본능”이라는 통념도 영장류 연구 결과에 반한다. “나는 사육 상태의 침팬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짝짓기를 수천 번 이상 관찰했지만, 암컷의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인간의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보노보 사이에서 강간(강압적 교미)은 극히 드물다. “짝짓기를 꺼리는 암컷에게 수컷이 털을 곤두세우고 위협하는 모습은 보았지만, 결국에는 비명을 지르는 피해자를 구하려고 다른 암컷들이 개입하고 나선다. 그들은 난폭한 수컷을 쫓아가 바르게 처신하는 법을 가르친다.” 강압적 교미는 무리의 유대가 강할수록 더욱 설 자리가 없다. 침팬지보다 훨씬 유대가 강한 보노보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강간이 없다.
그렇다면 같은 영장류인 인간은 왜 유독 강간을 저지르는 것일까? 지은이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생활하는 영장류와 상대적 고립 상태로 살아가는 인간의 생활 양식”, 즉 인간 특유의 ‘가족제도’를 그 원인으로 추정한다.
차이를 바로 보는 일은 젠더 스펙트럼에 대한 인간의 협소한 이해력을 넓히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저자는 무지갯빛 침팬지 ‘도나’를 그 예로 든다. 도나는 암컷이지만 수컷의 상징인 무성하고 긴 털을 갖고 있었고, 수컷 무리와 함께 ‘우우’ 소리를 내며 허세를 부렸다. 여느 암컷과 달리 부풀어 오른 생식기를 과시하지도 않았고, 수컷으로부터 구애를 받지도 않았으며, 당연히 새끼도 낳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암컷에게 성적 접촉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트랜스젠더로 보기 어려웠고(도나가 자신의 젠더를 어떻게 느끼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레즈비언과도 구별됐다. “수십 년 동안 유인원을 연구하면서 나는 그 행동을 수컷이나 암컷에 어울리는 것으로 분류하기 힘든 개체를 상당수 보았다.” 젠더는 남녀의 이분법이 아닌 연속적 스펙트럼이라는 사실을 영장류 연구도 뒷받침해준 셈이다.
지은이는 영장류 연구 결과를 ‘비교’를 위해서만 활용할 뿐, ‘교훈’이나 ‘규범’으로 삼지는 말라고 시종일관 주의를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인간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이 무지갯빛 침팬지 ‘도나’는 무리에서 배척·공격당하지 않았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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