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민족주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 입문
숀 쉬한 지음, 이강훈 옮김 l 서광사 l 1만 9000원
제임스 조이스(1882~1941)는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개척자이자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이스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율리시스>가 그 모더니즘의 도래와 승리를 선언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으로 소설을 이끌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언어 자체에 주목하는 새로운 서술 방법과 무수한 문체 실험을 통해 리얼리즘이라는 전통적인 재현 방식을 넘어 소설 창작의 새 차원을 열어젖혔다는 것이 조이스 작품에 대한 통상적인 평가다.
영국의 저술가 숀 시핸(쉬한)이 쓴 <조이스의 ‘율리시스’ 입문>은 이런 표준적인 독해가 조이스 소설의 한쪽 측면만 부각한 것이며, 조이스가 자신의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정치적 메시지를 놓쳤다고 비판한다. 요컨대, 조이스를 ‘비정치적인 순수한 스타일리스트’로 묘사함으로써 정치적 이념의 멸균실에 박제화한 것이 전통적인 조이스 독해법이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조이스의 작품에 나타난 모더니스트의 실험적 성격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아일랜드의 식민지 역사와 아일랜드인의 민족주의 투쟁 속에서 작가의 정치적 의식을 읽어내려고 한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조이스는 20살 때 대학을 졸업한 뒤 아일랜드를 떠나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스위스의 취리히를 거쳐 생의 후반기 20년을 프랑스 파리에서 보냈다. 젊은 나이에 이방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이런 이력은 조이스를 세계시민주의자라는 단일한 틀로 이해하는 데 빌미를 주었다. 하지만 지은이는 조이스가 조국을 떠나 살면서도 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고, 영국의 식민 지배에 벗어나 아일랜드가 정신적·문화적으로 독립하기를 갈망했다고 말한다. 1907년 트리에스테에서 행한 아일랜드 문학 강연에서 조이스는 ‘반동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정신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조이스가 말한 ‘반동세력’에는 아일랜드 식민 지배를 지속하려는 제국주의 영국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내부의 친영파 가톨릭 세력도 포함된다. 지은이는 조이스의 정치 이념을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로 규정하는데, 그런 조이스는 당시 아일랜드 민족주의 세력의 구심체로서 영국 지배에 맞서 독립투쟁을 이끌던 신페인당을 지지했다.
<율리시스>는 아일랜드의 독립 투쟁이 한창이던 1914년부터 1921년 사이에 쓰였으며, 조이스가 마흔살이 되던 1922년에 파리에서 출간됐다. <율리시스>의 시공간적 배경은 1904년의 더블린이다. 1902년 파리로 떠났던 조이스는 어머니의 와병과 죽음으로 고향에 돌아왔다가 1904년까지 더블린에 머물렀는데, 소설 속 1904년 6월16일은 조이스가 미래의 아내가 될 노라 바너클과 처음 데이트를 한 날이었다. 소설은 이날 오전 8시에 시작해 그다음 날 새벽에 끝나는데, 만 하루가 안 되는 이 시간 동안 중년의 유대인 레오폴드 블룸과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이 스티븐 디덜러스가 각자의 길을 가다 마지막에 합류해 서로를 알게 되는 것으로 종결된다.
‘율리시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이스는 이 이야기를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구조 속에서 풀어냈다. 이 서사시에서 영웅 오디세우스는 천신만고의 고난을 이겨내고 이타카의 집으로 돌아가 아들 텔레마코스와 함께 침입자들을 물리치고 아내 페넬로페와 만난다. <율리시스>는 이 서사시의 틀을 빌려와 그 10년의 모험을 더블린의 하루 속에 집약한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은 각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존재들이다. 레오폴드 블룸은 자신이 유대인임을 받아들이기를 망설이는 사람이며, 스티븐 디덜러스도 아일랜드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이다. 소설 말미에 디덜러스는 영국 병사에게 폭행을 당해 쓰러지는데, 블룸이 그 젊은이를 구해내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 오디세우스와 만나듯, 젊은 디덜러스가 블룸이라는 중년의 유대인을 만나 상징적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블룸의 집에서 디덜러스는 아일랜드 시를 읆고, 블룸은 <구약성서> ‘아가서’의 히브리 시를 암송한다. 지은이는 이 장면을 두 사람이 혼란을 이겨내고 각기 자기 정체성을 수용하는 장면으로 해석한다. 동시에 유대인 블룸과 아일랜드인 디덜러스의 만남은 두 사람이 도달한 정체성이 타자를 향해 열린 정체성임을 암시한다. 복고적 국수주의나 완고한 종족주의가 아니라 박해받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민족주의인 셈이다.
이 책은 20세기 <율리시스> 비평사도 간략히 검토한다. 가장 먼저 조이스의 작품을 주목한 사람은 시인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이었다. 엘리엇은 <율리시스>를 ‘20세기 문학의 길을 바꿔놓을 작품’으로 예견했다. 이어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가 <율리시스>를 모더니즘 텍스트의 정전이자 세계시민주의의 승리로 평가했다. 두 사람의 평가를 발판으로 삼아 1960년대까지 미국 학계가 중심이 돼 ‘고급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세련된 비정치적 예술가’라는 조이스 상을 완성했다. 이런 표준화한 조이스 해석을 깬 것이 1970년대 프랑스에서 발흥한 포스트구조주의적 독해다. 자크 라캉, 엘렌 식수, 자크 데리다 같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조이스의 문체 실험에 주목해 조이스 소설 언어를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미끄러운 기표”로 해석했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런 기호학적 해석은 사회적·정치적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작품을 역사의 진공상태로 밀어넣는 결과를 빚었다고 지은이는 비판한다.
이런 편향에 맞서 <율리시스>의 정치적 성격을 새롭게 읽어낸 것이 탈식민주의 해석이다. 1980년대에 등장한 탈식민주의 관점은 ‘영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아일랜드’를 중심에 놓고 조이스의 작품을 다시 독해함으로써 조이스 비평의 지형을 바꾸어놓았다. 이 책의 지은이가 지지하는 관점도 바로 이 탈식민주의 독법이다. 탈식민주의 해석을 거침으로써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언어라는 매체를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모더니즘 태도가 전면에 나타난 작품일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둘러싸고 벌인 조이스 자신의 정체성 투쟁이 배어든 정치적 성격의 작품으로 나타났다. <율리시스> 속 오디세우스 모험은 문체를 실험하는 언어의 모험일 뿐만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을 찾는 젊은이의 문화적 투쟁이기도 하다. 이 두 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조이스 작품을 전례 없는 예술성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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