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딴판…일본 정부·기업 “내년 임금 올려라” 한 목소리 왜?
물가 급등하지만 금리 카드 못꺼내
“내년 춘투가 (일본 경제가)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에 들어갈 수 있을지를 가르는 갈림길이다. 물가상승률을 넘어서는 임금 인상을 해야 한다.”(10월28일 기시다 후미오 총리 기자회견)
“임금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물가다. 회원 기업에 (임금 인상을) 호소하겠다.”(10월17일 도쿠라 마사카즈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 회장 기자회견)
일본에서 노사정 모두가 내년 춘투(봄철 임금협상) 때 임금 인상이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본의 대표 경제지인 <니혼게이자이신문>도 사설에서 “노조는 임금 인상을 통해 존재감을 보여라”(10월27일), “기업은 충분한 임금 인상에 나서라”(10월23일)고 강하게 호소했다. 물가 상승을 우려하며 ‘임금 인상 자제’를 요청하고 있는 한국 사정과는 딴판이다. 왜 그럴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물가 급등’이다. 일본의 소비자물가는 원자재 가격 상승과 기록적인 엔화 약세 등의 영향으로 빠르게 치솟고 있다. 지난해 9월 0.1%던 소비자물가는 올 4월 2.1%로 오르더니 9월엔 31년 만에 3%대에 올라섰다. 다른 나라와 견주면 낮은 수치지만,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이 이어져온 디플레이션 사회다. 물가 변동을 거의 체감하지 못하고 살아와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일본은행의 9월 조사를 보면, 소비자들이 느끼는 체감 물가상승률은 무려 10%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난국에 대응하려면 물가를 잡아야 하고, 물가를 잡으려면 금리를 올려야 한다. 하지만 일본은행은 금리를 올리기 힘든 처지다. 금리가 오르면 경제가 위축되는데다, 무려 1016조엔(일본 국내총생산의 약 256%·약 1경원)에 이르는 국가 부채에 대한 이자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금리를 올리지 못하니, 임금 인상을 통해 소비를 진작할 수밖에 없다.
실제 일본 임금은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실질임금은 1년 전에 견줘 5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소비자들이 지갑을 더 닫을 수밖에 없다. 실제 소비자심리지수는 9~10월 두달 연속 하락했다. ‘잃어버린 30년’의 수렁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속에서 임금을 지렛대 삼아 ‘물가 상승→임금 인상→소비·투자 확대→경제 활성화’라는 선순환의 물꼬를 트자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된 셈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원자재 등 비용 상승을 기업은 무리하게 견디지 말고, 적절히 가격에 반영해야 한다. 다만 여기서 확보한 수익을 임금 인상으로 환원하는 선순환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이어 “임금 인상을 매개로 일본의 고질적인 문제인 낮은 생산성과 미흡한 인적 투자 등 노사 모두 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로(0) 금리를 고집하는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도 ‘임금 인상을 수반한 2% 물가 상승’이 안정적으로 유지돼야 금융완화를 중단할 수 있다고 여러차례 말해왔다.
일본의 최대 노동조합인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연합)는 내년 봄 임금협상에서 5% 인상안을 요구하기로 했다. 연합이 5~6% 인상안을 꺼내든 것은 28년 만이다. 요시노 도모코 연합 회장은 지난달 25일 취임 1주년을 맞아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노동자들은 고물가·엔저·코로나19 등 ‘삼중고’로 생활에 압박을 받고 있다. 내년 춘투에서 5% 정도의 임금 인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도 이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일본은 이미 대기업·중소기업을 상대로 임금 인상에 나설 경우 법인세 공제를 해주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발표된 경제종합대책에선 기업의 임금 인상 지원 명목으로 12조2000억엔(약 116조7000억원)을 책정했다. 기시다 총리는 2일 자동차회사 경영진과 경단련 회장을 만나 임금 인상 등에 협조를 구했다.
기업도 임금 인상에 나설 생각이지만, 인상률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도쿄상공리서치가 10월2~12일 4433곳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2023년 임금 인상을 예정하고 있다고 응답한 곳은 81.6%에 이르렀다. 다만 인상률과 관련해 5% 이상이라고 응답한 곳은 4.2%에 머물렀다. 2~5% 사이가 41.5%로 가장 많았고, 2% 미만도 35.8%나 됐다. <아사히신문>은 “중소기업에선 큰 폭의 임금 인상은 어렵다는 신중한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와 일본은행이 구상하는 임금 인상에 따른 소비 진작, 물가 상승의 선순환이 이뤄질지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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