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만약’이라는 슬픔의 교수대

한겨레 2022. 11. 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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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유실물 사진을 보니 절로 그 물건들을 보는 유족들 마음은 어떨까 상상하게 된다.

그날 아침 레모네이드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그 전날 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사과, 자몽, 바나나 옆에 있는 레몬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 레몬을 누군가 심고 물을 주고 상자에 넣고 기차나 트럭으로 자식을 잃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저주받은 동네로 오지 않았더라면, 살아 숨 쉬면서 살고 싶은 만큼 사는 다른 집 아이들이 레몬을 씻고 왁스를 뿌리지 않았더라면, 가게 주인이 "신선한 레모네이드 드셨나요?"라는 문구를 써서 걸어놓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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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체육관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유실물센터에 1일 오전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수거한 유실물들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우리 모두
레이먼드 카버 지음, 고영범 옮김 l 문학동네(2022)

이태원 참사 유실물 사진을 보니 절로 그 물건들을 보는 유족들 마음은 어떨까 상상하게 된다. 이제 유족들은 고통스럽게 수많은 기억들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 아이가 무슨 음식을 좋아했는지, 언제 처음 걸었는지, 어떤 공룡을 좋아했는지, 어떤 옷을 좋아했는지, 어떤 날씨를 좋아했는지, 어떻게 웃었는지….

세상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이 부재함을 말해 줄 것이다. 세상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유족들을 고독하게 할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시 ‘레모네이드’(<우리 모두>)에서 짐 시어스는 어린 아들 짐 시어스 주니어를 잃었다. 짐은 헬리콥터가 강에서 아들의 시신을 건져내고 들어 올리는 과정을 봐야 했다. 짐 시어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날 아침에 레모네이드가 담긴 보온병을 찾으러 아들을 차로 돌려보낸 자신을 책망하고 또 책망하고 있었다. 자기 말을 들어주는 누구에게나 그날 아침에 레모네이드가 필요하지 않았다고 수백 번 수천 번 말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레모네이드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그 전날 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사과, 자몽, 바나나 옆에 있는 레몬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 레몬을 누군가 심고 물을 주고 상자에 넣고 기차나 트럭으로 자식을 잃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저주받은 동네로 오지 않았더라면, 살아 숨 쉬면서 살고 싶은 만큼 사는 다른 집 아이들이 레몬을 씻고 왁스를 뿌리지 않았더라면, 가게 주인이 “신선한 레모네이드 드셨나요?”라는 문구를 써서 걸어놓지 않았더라면. 그러니까 이 추론은 지구상에서 경작된 첫 번째 레몬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상에 레몬이라는 게 없었다면’, 그랬다면 짐 시어스는 여전히 아들을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짐 시어스는 추락을 멈추고 자기 삶을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또 만약 어떤 일들이 일어났다면 혹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짐 시어스가 아들을 잃지 않았을까?

나는 세월호 유족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수도 없이 들었었다. 만약 우리가 안산으로 이사 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결혼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아니 아예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른다. 부모들의 복잡한 양심은 후회하고 후회하다 못해 기어이 자신을 책망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에서도 우리는 벌써 수많은 ‘만약’을 만나고 있다. 만약 그날 경찰이 교통 흐름을 통제했더라면, 만약 경찰이 “압사”라는 일상적이지 않은 단어가 아홉 번이나 나오는 첫 번째 신고만 잘 대응했더라면, 그 뒤에 이어졌던 열 번의 신고만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지하철이 무정차 했더라면….

그러나 언제까지나 가정법 속에서 살 수는 없고 가정법이 직설법을 이기게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을 끝까지 알아야 하고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현실을 바꿔야 한다. 이태원 유족들을 찾은 세월호 유족들은 ‘국민이 유가족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는 말을 했다.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이스라엘의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은 유가족을 이렇게 표현했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흔들리는, 슬픔의 교수대’에서 보내는 것. 이렇게 옮겨적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리고 고개가 숙여지는 표현이다.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재난으로 인한 유가족도 나오지 않는 세상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말로는 다 못할 슬픔에 함께하겠다.

정혜윤 <CBS>(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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