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예고된 실패를 안고 쓰는 일

한겨레 2022. 11. 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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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노동 8년 차.

책을 읽으면 '나'로 시작하는 첫 번째 글이 아니라, '당신'으로 시작하는 두 번째 글을 쓸 힘과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스 안에서 모든 책임은 내가 갖는 거야. 그 작은 세상에서 내가 주인이 되는 거고." 가정과 일터에서 자기만의 자리를 가질 기회가 없던 누군가에게 그 노동은 자긍심이기도 하다.

나는 글을 쓰는(쓰고 싶은)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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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두 번째 글쓰기
당신의 노동을 쓰는 나의 노동에 관하여
희정 지음 l 오월의봄(2021)

집필 노동 8년 차. 그간 나를 재료 삼아 글을 써왔다. 다섯 번째 단행본 출간을 앞둔 요즘, 오래전부터 고민한 일을 구체적으로 계획했다. 내 이야기는 원 없이 풀어냈으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풀어내는 글을 쓰고 싶었다. 누구의 말을 듣고 싶은지, 타인의 말은 어떻게 글이 될 수 있는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궁금했다. 막연한 질문을 안고 10년 넘게 현장으로 찾아가 누군가의 말을 듣고 쓴 기록노동자 희정의 <두 번째 글쓰기>를 읽었다. 책을 읽으면 ‘나’로 시작하는 첫 번째 글이 아니라, ‘당신’으로 시작하는 두 번째 글을 쓸 힘과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서문을 읽을 때부터 자주 멈칫거렸다. 타인의 삶을 기록하며 느낀 고통과 고민의 무게가 오롯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글쓰기는 나를 돌보는 일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쉽게 무례해지는 일이다. 존재를 납작하게 만들고 생각을 굳게 만들 위험을 지닌 과정이어서, 쓸 때마다 촉각을 곤두세워야 입체적인 면의 작은 조각이라도 담을 수 있다. 하물며 타인의 삶을 기록하는 일은 어떨까. 나와 다른 역사를 통과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너의 이야기를 듣고 풀어내는 일에는 얼마나 큰 무례와 후회가 예고되어 있을까.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가 ‘말’을 갖게 되기까지 견뎌오고, 싸워오고, 버텨내고, 살아온 시간을 더듬는 일이다.”

예고된 실패를 알면서도 작가는 찾아가서 듣고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집단 해고된 콜센터 노동자, 톨게이트 노동자, 청소 노동자, 퀴어 노동자를 찾아갔고, 산업 재해라는 이름으로 담을 수 없는 노동자들의 죽음과 그 주위를 감싼 노동의 구조를 보고 들었다. 작가는 ‘다른’ 질문을 던져,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삶과 생각을 풀어내려고 노력한다. 사실은 다른 질문을 건넨 적도, 다른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 적도 없으면서 ‘목소리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세계의 오만함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글을 썼다.

과정은 매끄럽지 않았다. 오해와 오독은 의지만으로 통제할 수 없었음을 진솔하게 고백한다. 책을 읽는 동안 나 역시 작가의 어려움에 공감하며 겁을 먹었고, 실패를 안고도 계속 듣고 써왔던 사람만 표현할 수 있는 구체성에 빠져들었다. 가령, 톨게이트 노동은 ‘네모난 한 평짜리 세상’에서 일하는 열악한 일이라고 폄하되기도 하는데, 작가가 만난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부스 안에서 모든 책임은 내가 갖는 거야. 그 작은 세상에서 내가 주인이 되는 거고.” 가정과 일터에서 자기만의 자리를 가질 기회가 없던 누군가에게 그 노동은 자긍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감히 동정하며 고통에만 집중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이 책은 예고된 실패를 안고도 계속 삶을 말하는 누군가와 그의 말을 들으며 계속 쓰는 누군가의 애정들에 관한 책이다. 기록 노동에 관한 책이고, 그 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노동이 담긴 책이다. 잘 쓰는 법 이전에 잘 듣는 법에 관한 책이다. 잘 쓰려고 꽉 쥔 주먹에 힘을 풀어 낯선 손을 잡고 함께 살자고 말하는 책이다. 나는 글을 쓰는(쓰고 싶은)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책임감을 안고 쓰는 이야기가 어떤 걸 남기는지 이토록 생생하고 겸손하게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실패를 안고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홍승은/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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