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비밀의 방] 55. 전상국 문학의 뜰에 우뚝 선 나무
‘한국문학 거장’ 학창시절 꿈 키워
드라마 ‘아베의 가족’ 원작 소설가
18년동안 김유정문학촌장 역임
강원문학 창간호 등 2만여권 수집
60년 문학활동 전시공간 마련
25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그곳엔 과수원 주인이 쓰는 창고가 있었다. 산신령이라 불리는 과수원 주인은 늘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럴까. 그가 눈길을 주는 무엇이든 미소가 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해가 삼악산에 걸리는 저녁이면 머리가 하얀 주인은 작업복을 벗었다. 그리고 삼악산 노을이 내다보이는 창고 의자에 앉아 봉지커피를 마셨다. 그는 노을 진 삼악산을 바라볼 때도 있었고, 그가 심어놓은 장미밭을 내다볼 때도 있었다. 그는 이따금 긴 책상에 엎드려 무언가를 끄적였다. 오래오래 그는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자신의 귀로 들었다. 해가 저물고 삼악산 노을이 붉었다. 덩달아 붉어진 장미 한 송이를 전지가위로 잘라 곱게 신문지에 쌌다. 저녁에 그의 아내에게 줄 꽃이었다.
어느 날 키 큰 나무 같은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교수였고, 소설가였고, 백발의 유일한 친구였다. 백발의 주인은 주머니에서 조심스레 “이게 시일까?” 하며 종이를 꺼내 친구에게 건넸다. 키 큰 소설가는 산신령이 따라준 봉지커피를 마시며 구깃구깃한 종이에 써진 시이기도 하고, 시가 아닌 듯한 글을 읽었다. 그로부터 이따금 키 큰 소설가가 창고를 방문하면 백발의 산신령은 조심스레 종이를 내밀곤 했다. 키 큰 소설가는 연필로 써진 깨알 같은 글씨를 묵묵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면서 머리를 끄덕이기도 했고,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짚기도 했다.
훗날, 이름 없는 백발의 주인이 시집을 펴냈다. 시집 ‘산국농장 이야기’의 발문은 당연히 키 큰 나무 소설가가 써주었다. 그랬다. 키 큰 나무의 소설가는 한국문학의 거목인 전상국이었다. 이분은 친구가 시집을 펴낸 일이 그 무엇보다 기뻤다. 그로부터 산신령 김희목 시인은 시집을 네 권이나 펴냈다. 사람들이 이 백발 시인의 시를 읽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김희목 시인과 소설가 전상국의 우정 이야기는 사람들 입과 입을 통해 널리 퍼졌다.
세월이 흘렀다. 창고 자리엔 커다란 나무 기둥 같은 건물이 세워졌다. 전상국 문학의 뜰은 시인과 소설가의 마음이 합한 아름다운 터였다. 25년 전 시인과 소설가가 한 그루씩 심어놓은 느티나무가 뜰을 지키고 있었다. 손가락만큼 가느다란 느티나무가 이젠 거목이 되어 푸르렀다. 금빛 석양 속에 빛나는 전상국 문학의 뜰. 문학관 건물은 나무를 닮아 있었다. 아니 나무였다. 그것도 금빛 황금나무였다.
전상국은 춘천고를 다닐 때 이름난 학생 문사였다. 1959년 ‘산에 오른 아이’로 제6회 ‘학원문학상’을 받아 전국에 문재(文才)를 드러냈을 때 전상국은 세상을 다 안은 듯했다. 1963년 드디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동행’이 당선되었다. 전상국은 ‘동행’의 마지막 구절에 ‘ㅎㅎㅎㅎㅎㅎㅎ….’라는 초성을 과감하게 썼다. 지금의 컴퓨터에서 흔히 써지는 이 간결한 형식이 60년 전에 이미 전상국 소설가의 발상으로 만들어진 거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전상국의 이름을 문학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오랜 침묵과 헤맴으로 11년을 보냈다. 전상국은 고등학교 때 은사 이희철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네 문장은 안 돼. 이렇게 쓰다간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
선생님의 말씀은 묘하게도 전상국 작가가 깊은 좌절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그 엄격한 한 마디가 전상국의 문체를 튼튼히 키웠다. 마침내 눈물겨운 긴 어둠의 통로를 벗어난 해는 1974년이었다. 춘천에서 서울로 이주하고 나서 상봉동에서 쓴 ‘전야’.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실린 소설 ‘전야’는 폭풍전야란 말처럼 전상국의 새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전상국 작가의 손가락은 타자기를 쉴 새 없이 두드렸다. 전상국의 시대가 도래한 듯싶었다. 아니 확실히 전상국의 시대였다. 그동안 경희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강원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중단편 100여 편, 장편 4편, 500여 편의 콩트와 수필 등을 써냈다.
물론 양적인 작품 편수가 그 작가의 역량을 대변하진 않는다. 질적인 문학 성취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가, 그리고 독자들의 관심과 호응이 함께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전상국의 소설은 발표할 때마다 화제작이 되어 평단의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전상국은 한국전쟁 후의 분단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소설을 썼다. 대표적으로 ‘아베의 가족’이 그랬다. 또한 부조리와 폭력, 위압,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심리적 두려움,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되묻는 ‘우상의 눈물’은 그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
mbc드라마로 연작 방영된 ‘아베의 가족’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울렸다. ‘아베의 가족’은 삽시간에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이 소설은 만화, 무용극, 외국어 번역 등 전상국의 위상을 단숨에 높여주었다. 거장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영화 ‘우상의 눈물’ 또한 많은 찬사와 주목을 받았다. 그만큼 원작이 탄탄한 문제작이었다는 증거였다.
그리하여 여러 문학상이 연달아 전상국에게 주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대문학상을 비롯, 14번의 큰 상은 두 번의 훈장과 더불어 전상국의 빛이 되었다. 특히 2001년 강원대 교수로 부임하고부터 18년 동안 전상국은 꾸준히 김유정문학촌장을 맡아 일해왔다. 이제는 전국 제일의 문학촌으로 일 년에 7~80만의 관람객이 찾아온다. 이것은 전상국 작가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장편 ‘김유정의 사랑’은 그러한 김유정 작가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결실이었다. 춘천과 강원문학은 김유정문학촌으로 꽃피워졌고, 전상국은 영예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지나온 60년 문학 활동과 자신이 수집한 여러 중요한 자료를 한곳에 모아, 찾아오는 후배 문인과 시민들에게 아낌없이 보여주고자 마음먹었다. 그것이 바로 ‘전상국 문학의 뜰’이 세워진 취지라 했다.
문학관 내부는 거대한 나무의 속 같았다. 둥근 원형의 둘레로 2만여권의 귀중한 책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책의 재료도 나무가 아닌가. 나무 안에 깃든 종이의 나무, 생각과 문학의 글이 담긴 나무, 시인과 소설가와 여러 저술가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리는 나무, 그리고 전상국이라는 거목이 한 몸처럼 우리를 맞이했다. 좌우로 긴 사다리 두 개가 둥근 천창으로 쭉 뻗어 서가에 기대어 있었다. 방문하는 누구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고전과 신간을 뽑아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동화 속 ‘재크와 콩나무’처럼 사다리는 황금알이 열리는 길 같아 보였다. 자신이 평생 모은 창간호 들과 문우들이 보낸 서신과 소설책, 그리고 시집들, 노래 실은 동요집, 인문학서적 등, 전상국으로선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여러 문학관을 다녀보았지만, 이토록 방대하고 이토록 세심하게 자료를 배치한 문학관은 아주 드물었다. 나의 눈길은 한 진열장에 오래 머물렀다. 낡은 박카스 통 안에 가득히 담긴 편지 봉투들. 그 봉투 안엔 청년 전상국 작가가 아내 김옥자 님에게 보낸 아름다운 연애편지가 들어있었다. 그 위로 결혼 후 지금까지 써온 김옥자 여사의 가계부가 놓여 있고, 그곳엔 보이지 않는 글자 ‘절약’이 푸릇푸릇 담겨있었다. 석양 무렵 밖으로 나와 들깨를 터는 사모님을 뵈었다. 나의 아내가 말했다. “고령에 힘드실 텐데…. 그래도 건강해 보이세요. 언제 뵈어도 미소가 떠나지 않으시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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