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호광장의 심리툰과 함께 - 세상과 나 바라보기] 11. 재난에 대처하는 마음

팔호광장 2022. 11. 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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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받은 상처가 분노·갈등 변형, 이보다 함께 위로를
과거 삼풍백화점·성수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세월호 사고
각자 삶을 크게 변화시킨 재난
우리 뇌 큰 충격받고 트라우마 발생
노골적인 현장 영상·사진 전파 자제
긍정적인 착각·망각으로 위안을

또 한 번 믿을 수 없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핼러윈 데이를 앞둔 주말 도심 곳곳에 많은 인파가 모였다는 소식을 포털 사이트 뉴스 기사에서 얼핏 보고 잠이 들었는데 새벽 메시지 알람 소리에 잠시 깨서 습관적으로 대화창과 뉴스들을 보고 믿을 수 없는 소식에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삼풍 백화점과 성수대교의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세월호 사고 등의 숱한 대형 참사를 경험한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 비슷한 아픔을 마음 한 편에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어난 사고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심정입니다.

재난과 트라우마는 우리 삶을 크게 변화시킵니다. 큰 충격은 우리 뇌가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방식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마치 세상을 보는 새로운 안경을 쓰고 살아가는 것처럼 그 경험에 기초하여 주변 환경과 상황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어 사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이라도 비슷한 상황이나 유사한 소리, 냄새 등 사소한 자극에도 당시의 공포를 지금의 일처럼 생생하게 재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불편을 피하려다보면 일상 생활의 활동 반경이 좁아집니다. 큰 재난을 겪은 이에게 기억이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매일매일 새로이 경험하는 고통입니다. 새로운 삶을 꿈꾸는 유연한 마음을 갖기 어렵고 기억이란 섬에 고립되어 현재의 삶과 연결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경계하고 과도한 각성 상태가 지속됩니다. 그로 인해 깊이 잠들지 못하고 악몽에 시달립니다.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사소한 좌절이나 갈등, 오해에도 지나치게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늘 위험에 반응하여 대응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이들에게 어쩌면 그런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그런 일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세상과 사람에 대한 신뢰,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실제로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상황에서 미처 대처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수치심 같은 감정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들과 이겨내기 힘든 고통 앞에서 사람들은 결국 자신을 탓하게 됩니다.

강렬한 고통의 정서는 일상에서의 평범한 감정을 무뎌지게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친밀함을 느끼기 힘들고 정서적으로 무감각해져 일상의 활동에서 즐거움이나 생동감을 느끼기도 힘듭니다. 그런 힘든 정서를 이겨내기 위해서 술이나 약물, 심한 경우에는 자해 등 자기 파괴적인 방법으로 잠시나마 고통을 잊고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극적이고 위험한 활동에 매진하거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일에 강박적으로 몰두하는 등 오히려 스스로를 더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기도 합니다. 일상의 고요함보다는 그런 긴장감과 강렬한 자극이 잠시나마 삶에 뚜렷한 의미를 부여하고 망각과 위안을 주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 힘든 것 중 하나는 허무함일 것입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착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을 알지만 하루하루 그것을 잠시 잊은 채 내일을 위해, 한달 후를 위해, 혹은 먼 미래를 위해 준비합니다. TV를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사고가 일어나지만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착각이 있어야 우리는 긍정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재난에서 주변의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실제로 목도하면 나도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생생하게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정확하게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긴 하지만 매 순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느끼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도 의미 없게 느껴집니다.

트라우마가 그것을 경험한 이의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재난이나 사고가 일어나면 연일 방송과 인터넷 매체에서 보도되고 심지어는 SNS를 통해 정제되지 않은 장면들이 적나라하게 전파되어 공유됩니다. 그런 반복되는 소식들과 영상, 사진들은 이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경험한 이들 못지않은 충격을 안겨줍니다. 영상이나 뉴스의 전파를 자제해주세요. 언론에서도 노골적인 현장 영상이나 사진의 보도를 자제해야합니다.

수많은 재난에서 함께 받은 상처들은 여전히 잊히지 않고 분노와 갈등으로 변형되어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누군가를 탓하고 비난하기보다 아픔을 함께하고 위로할 때입니다. 혐오는 나에게도 상처가 될 것입니다. 주변을 돌아봐주세요. 위로해주세요.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치료와 상담을 찾아주세요. 조기 치료가 증상의 만성화를 예방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다시 한번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고인의 유가족들과 지인들께도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부상자들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팔호광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심리툰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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