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수상에 내 영화는 망했다 생각했죠"
연출한 캐나다 한인 2세 앤서니 심 감독 인터뷰
엄마 소영(최승윤)과 단둘이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 온 초등학생 동현(도현 노엘 황)은 도시락 김밥을 꺼냈다가 친구들에게 “방귀 냄새가 난다”며 놀림을 받는다. 남몰래 쓰레기통에 김밥을 버린 동현은 엄마에게 도시락으로 “다른 애들이 먹는 걸”로 싸달라고 부탁한다. 소영은 아들에게 가르친다. “누가 놀리거나 괴롭히면 ‘두 유 노 태권도?’ 하면서 한 대 세게 때려.” 결국 동현은 인종차별을 하며 괴롭히는 아이들을 때렸다는 이유로 정학을 당한다.
최근 캐나다의 밴쿠버·토론토국제영화제 등에서 잇따라 수상하며 '제2의 미나리’로 주목받는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도입부 장면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캐나다로 이주한 앤서니 심(36·한국명 심명보) 감독이 자신의 경험을 가공한 것으로 지난달 14일 폐막한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으로 초청됐다. 최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만난 그는 “한국 이민자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빼면 제 영화와 ‘미나리’는 매우 다른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미나리’가 1세대 이민 부부의 험난한 미국 정착 과정과 할머니의 진한 사랑에 초점을 맞춘 반면,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단둘이 이민을 떠난 어머니와 아들 간의 갈등과 화해, 사춘기에 이른 아들의 의 정체성 찾기가 중심이다.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 겸 배우 마야 안젤루는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면, 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영화에서 중학생이 된 동현(이든 황)의 학교 선생님은 이 말을 인용하며 가족을 주제로 뭔가를 만들어 오라는 숙제를 내준다. 이에 동현과 엄마 소영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조부모가 살고 있는 시골로 향한다. 실제 심 감독 아버지의 고향인 강원도에서 촬영했다. 그는 “이번 영화를 제작하는 기간에 한국에 사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면서 “코로나19 때문에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우리 가족에 대한 이 영화를 함께 보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웠다”고 했다.
영어는 물론 한국어도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심 감독은 현지 한인마트에서 일하기도 했고 고교 졸업 후 한국에서 1년간 머물기도 했다. 동현이 강원도에 가는 것 역시 실제 심 감독의 정체성 찾기와도 관련이 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의 과거, 우리 가족의 과거,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고 내 뿌리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심 감독은 ‘미나리’가 2020년 초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을 때 ‘라이스보이 슬립스’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한국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겪는 내용의 영화이고 유명한 배우들이 나와 큰 상을 받았으니 내 영화는 망했다고 생각했어요. 시나리오를 버려야 하는 건가 싶었죠. 그래서 먼저 ‘미나리’를 본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이민자 이야기란 것을 빼면 많이 다른 영화여서 괜찮다고 하더군요.”
배우로 활동하며 수십 편의 연극과 드라마, 영화에 출연해 온 심 감독은 밴쿠버 연극계에서 제작과 연출을 겸하며 영화감독을 준비했다. “서른이 되기 전 장편영화를 찍고 싶었다”는 그는 2019년 저예산 영화 ‘도터’로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라이스보이 슬립스’로 재능을 꽃피웠다. 그는 이 영화에서 소영의 직장 동료인 사이먼 역을 맡아 무용가 출신 최승윤과 호흡을 맞췄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헌신적인 한국 어머니들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어른이 돼 보니 우리 어머니들이 얼마나 열심히 사셨는지 새삼 깨닫게 됐어요. (서구권) 영화가 묘사하는 아시아계 여성들은 제가 아는 한국 어머니와는 너무 맞지 않았죠. 멋있고 강하면서도 복잡한 면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 좀 더 잘할 걸’ 하는 마음으로 소영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차기작으로 1992년 LA폭동에 관한 작품을 준비 중이라는 그는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한국영화’로 정의했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 캐나다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의 영화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 감정을 쏟아 넣은 영화죠. 캐나다 영화가 아니라 그냥 한국 영화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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