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슬픈 영혼들의 작은 몸짓을 보았다

기자 2022. 11. 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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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메일을 열어보는 손끝이 떨렸다.

“이태원 사고 희생자를 위한 교내 합동 분향소 설치를 안내하오니, 애도의 마음을 함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읽으면서, ‘아’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갑자기 눈이 뜨거워졌다. 참사의 희생자들이 바로 옆에 있었다는 실감이 밀려왔다. 중앙대 대학원생 3명이 희생되었다. 모두 유학생들이었다. 캠퍼스에서 한 번쯤은 마주쳤을지도 모를 예비 석사, 박사들이었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후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반 뼘쯤 땅에서 떠 있는 상태로 생활하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 희생된 사람들의 사연들, 유족들의 절규와 통곡, 극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들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그런 나 자신이 낯설었다. 숱한 죽음의 이야기들을 현장과 거리를 둔 채 읽으며 슬퍼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죽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음에 안도하는가.

가까이에 희생자들이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 나는 당황했다. 나와 ‘이태원 핼러윈 참사의 현장’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대도시 참사는 희생자를 선별하지 않는다. 조그만 원인으로도 대규모 희생자들을 불러올 수 있다. 안전은 예방이며, 치안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국가의 의무다. 치안의 실패는 국가 통치의 실패이다. 그렇기에 ‘이태원 핼러윈 참사’는 역사적으로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 정도로 부끄러운 ‘사회적 재난’이다.

교내 합동 분향소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숙연한 침묵이 깔려 있었다. 이미 많은 이들이 노란 포스트잇을 붙여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었다. 깊은 묵념을 하고 난 후 무거운 마음으로 포스트잇을 살펴보았다.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요. 아프지 말고.” “이런 나라라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부디 편안하게 쉬길.” “이태원 참사 희생자분들 모두 좋은 곳으로 가셨길 바랍니다. 막을 수 있는 일을 막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저부터 노력하겠습니다.” 숱한 포스트잇들 속에서 진정으로 애도하는 마음들을 읽었다. 부끄럽게도 내가 위로를 받았다. 애도는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죽음과 ‘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고, 산 사람의 태도를 묻는 것이 애도다. 나 또한 조심스러운 마음을 담아 “못다 누린 청춘이 애절하여 마음이 아립니다. 부디 편히 쉬소서”라고 썼다.

‘죽음에 다가서는 마음’으로 ‘이태원 핼러윈 희생자들’을 추모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 ‘정치적 애도’와 ‘애도의 정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애도’는 죽음을 차별화하여 현실 정치가 죽음에 개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같은 편은 고귀한 죽음으로 찬양하고, 다른 편은 혐오받아도 마땅한 죽음으로 공격한다. 죽음에 대한 태도가 정치적으로 유리한가, 불리한가에 따라 바뀐다. 나는 ‘정치적 애도’의 풍경을 ‘세월호 참사’ 때도 보았고, ‘이태원 핼러윈 참사’ 때도 똑같이 목도했다. ‘세월호 참사’ 때는 행정안전부 고위공무원이 실종자 가족들 앞에서 사진 촬영을 하려 해 큰 분노를 일으켰다. 실종자 가족들 앞에서 이뤄진 교육부 장관에 대한 과잉 의전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에서는 한덕수 총리가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농담을 하고 웃어서 시민들을 경악하게 했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경찰배치와 관련해 책임회피성 발언을 했다가 사과했다. ‘정치적 애도’가 파생시킨 무의식적 실수가 더 큰 정치적 문제를 야기한 사례이다.

‘애도의 정치’는 재난을 함께 겪은 ‘산 자들의 실천’과 연결된다. ‘애도의 정치’는 우선 사건의 실체를 규명해 사건 자체가 보이도록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다음에는 비극적 참사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규명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를 통해 앞으로 한국사회가 변화해야 할 방향을 정하고 법적·제도적 개혁을 단행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사회는 ‘세월호 참사’ 때 ‘애도의 정치’를 통해서도 실체적 진실과 책임규명에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의 희생자들은 미래의 시민 안전을 위해 ‘두 눈 부릅뜨고 사회적 재난을 직시하라’고 호통치고 있다.

미래는 언제나 어둠 속에 있다. 바뀌리라는 희망만이, 우리를 연결시킨다. 미래를 향해 행동하고 실천하는 힘은 함께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이제는 ‘정치적 애도’를 극복하고 ‘애도의 정치’로 향해야 한다.

분향소에서 포스트잇을 쓰고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쓴 수많은 노란 포스트잇들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수많은 나비들이 모여 있는 듯이 보였다. 노란 포스트잇들의 미세한 흔들림 속에서, 슬픈 영혼들의 작은 몸짓을 보았다.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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