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철의 글로벌 인사이트] 지혜로운 진보, 어리석은 진보

전성철 변호사·글로벌 스탠다드 연구원 회장 2022. 11. 4.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온 나라가 IMF의 파고에 진땀을 흘리고 있던 1997년 12월, 김대중 당시 대선 당선자가 던진 첫 일성은 나를 무척 놀라게 했다. 바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창달하겠다’는 말이었다. ‘시장경제’?, 당시 대부분의 진보가 입에 담기조차 꺼리던 그 말을 당선자가 저렇게 먼저 선포하다니. 그런데 그 때, 내 머리에 떠오른 사람이 바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DJ와 루스벨트, 그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진보로서 보수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망가진 경제를 화려하게 부흥시키는 데 성공했다. 두 대통령은 모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통해 대성과를 이뤄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란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나? 두 개는 본질적으로 같은 원리로 움직인다. 즉, ‘자유’와 ‘공정’이 주어지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그것이다. ‘자유’를 주되 나쁜 짓만은 못하게 하면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반면 마음대로 거래하게 하되, 다만 나쁜 짓, 예를 들어, 새치기 같은 짓은 못하게 하면 그곳은 ‘시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안심하고 열심히, 신나게 뛰게 되고, 그래서 시장을 통해 나라가 번성하는 것이다.

루스벨트와 DJ의 성공은 이 원리의 가장 극적인 예들이다. 이 진보 대통령들의 성공은 두 나라에서 모두 진보의 시대를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루스벨트 이전까지 14명 대통령 중 진보는 단 세 명에 불과했었다. 그것이 루스벨트 이후 역전되어 이제 15명 대통령 중 진보가 절반을 넘긴 8명이 됐다. 한국도 기세가 만만치 않다. DJ 이후 3대3으로 균형이 이루어진 상황이다.

DJ는 노벨상까지 받고 진보 노무현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은퇴했다. 그렇다면, 노무현은 어땠는가? 그는 업적보다는 담대함으로 진보에 큰 기여를 한 대통령이었다. 그가 정치 이력에서 보여준 담대함에 국민들은 감동했고 그 감동의 물결이 거대한 진보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한마디로 DJ는 민주주의 원칙으로 경제를 살렸고 노무현은 소탈한 용기로 진보를 활짝 꽃피웠다.

그렇다면, 그 뒤를 이은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대통령이었는가? 그는 큰 강점과 큰 약점을 모두 보유한 사람이다. 약자에 대해 강한 측은지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자기편 챙기기’를 대단히 중시한 대통령이었다.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이, 또 자주 ‘공정’이 훼손되었다. 그 공정의 훼손, 즉 민주적 절차의 훼손은 거대한 국민적 분노를 낳았다.

이 국민적 분노는 앞으로 두고두고 진보의 운명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게 한다. 미국 정치에서 루스벨트 이후 진보가 걸핏하면 보수를 추월하게 될 정도로 약진하게 되었던 것은 수십 년 동안 진보가 심각한 ‘공정성’ 시비에 연루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DJ 정권 때 그의 집권 과정에서 공정성 시비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진보 노무현에게 집권 기회가 올 수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만일 DJ 행정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대선 패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한민국 진보는 한마디로 심하게 답답한 상황에 있다. 모든 징후로 볼 때, 앞으로 이 나라에 미국과 같은 진보 융성의 시대가 올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열렬한 진보가 많이 있지만, 열렬한 ‘반(反)진보’는 더 많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진보’의 근본적 이미지는 너무 큰 상처를 받아버렸다 .

보통 ‘깨끗함’ ‘겸손함’ ‘공정함’ ‘정의 추구’ 등으로 상징되는 진보의 이미지가 지금은 ‘내로남불’ ‘탐욕’ ‘파당적’ ‘억지’ 등으로 바뀌어버렸다. 여기에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그룹이 ‘처럼회(민주당 일부 초선 의원들의 모임)’ 같은 것이다. ‘처럼회’ 멤버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떠오른 것은 그들과 대비되는 그 나이 때의 DJ와 YS의 모습이다. 그 두 분의 정의와 민주주의를 향한 포효들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현재로서는 한국에 미국같이 진보가 꽃피우는 시대가 오기는 요원해 보인다. 도리어 긴 겨울이 기다리고 있다고 보인다. 유감스럽게도 이 나라의 진보는 보스의 위상 때문에 더 어두워지고 있다. 그들이 내세운 구원투수가 일종의 범죄 백화점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지금 이 나라 진보는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가느다란 밧줄에 온몸을 매달고 절벽을 오르려 안감힘을 쓰고 있는 등반자의 모습, 그것이다.

이 진보에 새로운 별이 나타나야 한다. 그 새 별은, 무엇보다, 과거에 있었던 진보의 실수들을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하는 솔직함과 진지함, 그리고 새로운 비전, 가슴 뛰는 비전을 던지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젊을수록 좋다. 존 F 케네디가 그랬고, DJ, YS가 그랬다. 보수와 진보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그 크기 차이가 크면, 그 수레는 앞으로 가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정말 진보가 잘 되기를 바란다.

대한민국 진보들이여! 앞으로. 미국의 진보같이 발전하고 싶은가? 무엇보다 ‘어리석은 진보’들을 멀리해라. ‘범죄적’ 진보라 믿어지면 더욱 멀리해라. 특히 젊은 진보들은 DJ 공부를 열심히 하기 바란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