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사법불신의 시대, 약자들 위로하는 법조물

기자 2022. 11. 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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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 장르는 단연 법조물이다. 지난달에는 월화극 <법대로 사랑하라>(KBS)부터 토일드라마 <디 엠파이어: 법의 제국>까지, 일주일 내내 법조인 드라마가 프라임타임을 장악하기도 했다. 물론 유행이라고 하기에는, 안방극장의 대세 장르 자리를 법조물이 차지한 지 오래다.

김선영 TV평론가

다만 흥미로운 것은 법조물의 새로운 경향이다. 법조물이 국내에서 처음 장르군을 형성할 무렵 그 인기를 견인한 것은 검사 캐릭터였다.

공익을 대표하는 1인 국가기관으로서 거대악을 응징하는 검사 드라마는 한국형 슈퍼히어로물의 성격을 띠며 대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곤 했다. 이 같은 열혈 검사 히어로물의 계보는 올해 초 방영된 <어게인 마이 라이프>(SBS)나 현재 방영 중인 <진검승부>(KBS) 같은 작품들로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근래 법조물의 주도권은 변호사에게로 완전히 넘어온 듯하다. 변호사 드라마는 양적으로도, 화제성으로도 검사 드라마를 압도하고 있다. 지난해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빈센조>(tvN), 올해 최고의 화제작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ENA), 현재 인기리에 방영 중인 <천원짜리 변호사>(SBS) 등만 봐도 그렇다.

법조 히어로물의 주역 교체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부패한 거대권력과의 대결로 갈등 구도가 좁혀지는 검사 드라마에 비해 변호사 드라마는 의뢰인들의 사연을 녹여내며 더 풍성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장점이 있다. 소재 또한 형사사건에 국한되지 않아 한층 다양한 사건을 다루게 된다. 소위 ‘꼴통 캐릭터’라 해도 조직의 법규를 따라야 하는 검사보다 변호사 캐릭터 운신의 폭이 더 넓다는 장점도 중요한 요소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요인은 시대 정서에 있다. ‘검찰공화국’이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검사가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세상에서 약자를 위해 정의를 실현하는 검사 캐릭터는 판타지로도 소비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더는 거대권력 응징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하기 힘든 세상에서, 대중은 소외된 이들을 대변하는 선하고 친근한 이웃으로서의 변호사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국선변호사’라는 직업을 처음 본격 조명한 <너의 목소리가 들려>(SBS), 소시민들의 친구 같은 히어로를 내세운 <동네 변호사 조들호>(KBS) 같은 작품들이 보여준 미덕이다. 최근의 변호사 드라마에는 이 같은 친약자적 성격이 한층 두드러진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대표적이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지닌 변호사 주인공을 전면에 등장시킨 이 작품은 지적장애인, 북한이탈주민 싱글맘 등 다양한 소외계층 의뢰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천원짜리 변호사>도 빼놓을 수 없다. 주인공은 수임료의 장벽 때문에 법적 자문을 받기 어려운 이들을 찾아가 1000원만 받고 고민을 해결해 주는 변호사다. 이 드라마 역시 사채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가장, 갑질에 고통받는 아파트 경비원, 전과자를 향한 낙인 때문에 누명을 쓴 전직 소매치기 등 여러 소외층의 사연을 담아낸다. 그런가 하면 <법대로 사랑하라>는 아예 법정의 문턱도 없앴다. 주인공은 ‘법률 카페’라는 생활 밀착형 공간에서 동네 주민들의 고충을 들어준다.

지난달 26일 종영한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사진>(디즈니플러스)는 이 같은 경향의 최전선에 있는 작품이다. ‘변방에 선 이들을 위한 변호사’ 정혜진의 동명 원작을 영상화한 이 작품에는 두 명의 국선변호사가 등장한다. 거대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해온 거대로펌에 몸담았다가 좌천된 노착희(정려원)와 지방 소도시에서 약자들의 선한 이웃으로 덕망을 쌓아온 좌시백(이규형)이 그 주인공이다. 극에서 제일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거대로펌 ‘장산’에서 승승장구했던 노착희가 “나, 장산 에이스야. 벌금 100만원짜리 잡범 소송? 눈 감고 발로도 해”라며 자신만만해하자, 좌시백이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 신이다. “여긴 장산의 부자 의뢰인들이 사는 국가와 완전히 다른 국가입니다. 여기 오시는 의뢰인들한테 국가는 전혀 자애롭지도 공평하지도 않다고요.”

좌시백의 말은 지금 대중이 변호사 드라마를 선호하는 이유의 핵심을 짚어준다. 그것이 사법 불신의 시대를 위로하는 판타지라는 사실을.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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