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쓰고 달콤한 경제] 물가안정과 금융안정 병행, 그 불가능한 임무
11월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다분히 매파적이었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세 가지 점을 분명히 했다. ‘인플레이션이 통제되지 않고 있다’ ‘금리 인상 속도는 늦추겠지만, 이를 금리 인상 사이클의 종점이 임박했다는 신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 이번 긴축 사이클의 금리 고점은 9월 FOMC에서 제시했던 것보다 더 높아질 개연성이 있다’. 천천히, 그러나 더 오랫동안 금리를 올리겠다는 것이 파월 의장 발언의 요지였다.
어떤 정책이든 대체로 상반된 효과(trade-off)가 발생한다. 중앙은행이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인플레이션이야 작년 하반기부터 글로벌 경제의 주요 화두였지만, 금융불안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9월 말부터였다. 이 글에서 말하는 금융불안은 주식시장이 아니라 채권시장에서 발생하는 혼란이다. 주가가 떨어지는 것도 가벼이 볼 일은 아니지만, 금리를 결정하는 채권시장의 혼란에서 비롯되는 파장은 주식시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 금리는 경제활동의 거의 전 영역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9월 말~10월 초 영국의 국채 금리가 급등하자 영란은행이 긴급 양적완화에 나섰다. 한국도 자금 조달처로서의 채권시장 기능이 사실상 마비되면서 한국은행의 유동성 지원 정책이 발표됐다. 미국 역시 국채 시장의 유동성 경색이 문제로 거론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 9월부터 연준이 양적완화를 통해 사들인 채권을 시장에 매각하는 양적긴축을 실시하고 있는데, 중앙은행이 내놓는 채권을 소화해 낼 수 있는 민간의 유동성이 현저히 부족한 상황이다.
양자택일한다면 금융안정 골라야
한국과 영국에서는 중앙은행이 공격적인 긴축정책을 펴는 와중에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이례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올해 경험한 기준금리 인상 속도도 파격이었지만, 긴축의 와중에 금융불안정을 완화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시장에 개입하는 모습도 나름의 파격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파격에도 불구하고 채권시장이 안정되고 있다는 조짐은 없다.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는 긴축 사이클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리가 계속 올라가는 상황에서는 일시적 유동성 공급이 큰 효과를 보기 어렵다.
당장 한국은행의 고심이 깊을 것이다. 미국의 기준금리가 4%까지 높아졌고, 향후 금리 인상 종착점의 금리(터미널 레이트)도 이전의 기대보다 높아진 상황에서 한국은 3%의 기준금리를 어떻게 조정해야 할까. 한국은행은 미국에는 해당되지 않는 통화가치 안정이라는 고민까지 안고 있다. 한국은 지난 10여년 동안 가계와 기업 등 민간의 부채 증가 속도가 미국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에 금리 상승으로 감내해야 할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다.
금융안정과 통화가치 안정 사이에서 선택을 한다면 금융안정을 골라야 한다고 본다. 미국보다 금리가 낮으면 자금이 빠져 나가는 리스크를 감내해야 한다.
요즘은 외국인뿐만 아니라 내국인의 자금도 금리와 환율을 고려해 자국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렇지만 미국을 따라 금리를 올리다가 금융 시스템이 흔들린다면 더 큰 규모의 자금이 빠져 나갈 수 있어, 환율보다는 시스템의 안정성을 고려해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게 옳다고 본다. 11월 금통위에서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만 인상하는 베이비스텝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한국 채권시장이 겪고 있는 극심한 신용경색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다.
다만 어느 경우라도 채권시장의 불안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신용경색을 해결하는 가장 교과서적인 처방은 시장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부양책(자금 공급)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요즘과 같은 고물가 국면에서 중앙은행이 이런 처방전을 쓸 수는 없다. 이번 FOMC에서도 파월 의장은 중앙은행의 과도한 긴축이 가져올 수 있는 리스크에 대한 질문을 받자 “상황이 악화되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을 아낌없이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높이 올려 놓은 금리를 공격적으로 낮출 수 있다는 뜻일 텐데, 파월 의장 발언의 방점은 ‘상황이 악화되면’에 찍혀 있다. 파월 의장은 과잉긴축보다 과소긴축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장기화되는 데 따르는 부작용이 훨씬 크다고 곧바로 발언했기 때문이다. 선제적 대응이 아니라 상황의 악화를 확인하고 난 다음의 수동적 대응이라는 뉘앙스가 강했다.
금리 인상 끝나도 고금리 지속될 듯
금융안정을 위한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이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 외에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착화됐던 과잉 유동성이 실물경제와 자산시장의 괴리를 심화시켰고, 구조조정을 지연시키면서 시스템 전반의 건전성을 약화시켰다는 성찰도 존재하는 것 같다. 장기간 지속됐던 과잉 유동성은 실물경제에 순기능으로 작동하기보다는 자산시장의 풍선효과로 귀결됐던 측면이 강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장기화됐던 저금리 기조는 구조조정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금리가 극단적으로 낮다보니 비효율적인 경제주체도 퇴출되지 않고 근근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에서 불황이 주는 미덕은 비효율적인 경제주체가 퇴출되고,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이 경제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체제의 활력을 높일 수 있다는 데 있다. 저금리가 고착화된 지난 10여년 동안 이런 과정은 구조적으로 봉쇄돼 왔다. 무차별적인 유동성 공급보다는 옥석을 가려 지원해야 한다는 당위론도 있을 수 있지만, 이런 방법으로 신용경색이 해결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옥석을 가리는 것도 힘든 일이고, 신용의 문제는 한 경제주체의 파산이 연쇄적인 파급효과를 가지는 다이내믹스가 존재해 정교한 외과수술식 처방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어렵다.
현 국면에서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불가능한 임무)이라고 본다. 금융불안정이 심화되면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파이터’가 아닌 ‘경제의 최종 대부자’로 나서겠지만, 선제적 대응보다는 사후적 수습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금리 인상이 끝나더라도 상당 기간 긴축지향적인 고금리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인플레이션으로부터 금융불안정이라는 또 다른 리스크가 잉태되고 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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