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 무려 2㎞ 길이 세계에서 가장 긴 기차 타보니…
“코로나로 침체된 여행업계를 되살리기 위해 스위스 기차 출범 175주년을 기념하며 무려 2㎞에 달하는 긴 열차로 세계 기록(the World Record)에 도전합니다.”
4량 열차 25개를 이어 장장 2㎞에 달하는 기차를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는 단순하게 시작됐다. 레나토 파시아티(Renato Fasciati) 래티셰반(Rhatische Bahn) CEO는 아이가 기차 모형을 한 줄로 이어 붙여 노는 걸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46세의 젊은 CEO는 100개의 여객 칸을 이어붙인 세계에서 가장 긴 열차가 코로나로 침체된 스위스 여행산업에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완벽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2년 동안 준비기간을 거쳐 지난 10월 29일(현지 시간) 드디어 세계에서 가장 긴 기차를 세상에 공개했다.
카프리콘(Capricorn) 열차 25대를 연결한 월드 레코드 기차는 객실 100칸, 총 무게 2990t, 총 길이 1906m에 달했다. 신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기다란 괴물 기차는 행사 전날 저녁까지도 일반 승객 운송에 사용한 열차를 연결해 완성했다. 그라우뷘덴(Graubunden) 주 각지에서 손님을 태우고 달리던 열차들은 알불라 터널(5.6㎞) 안으로 옮겨졌고 카프리콘 열차 기술자들이 모여 밤새 열차를 연결했다.
29일 오전 11시, 프레다(Preda)역에서 시작하는 알불라(Albula) 터널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2024년 6월 개통 예정인 새로운 알불라 터널 현장을 둘러보고 터널 시작 약 600m 지점에서 열차 탑승을 기다렸다. 거대한 콘크리트 터널 안에서는 스위스 전통 악기 알프호른 연주도 울려퍼졌다.
오후 1시 10분 옛 터널과 연결하는 통로 문이 열리고 드디어 탑승을 시작했다. 말그대로 끝이 안보이는 열차를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세상에 내보이려면 역시 터널 밖에 없었다. 직접 기차를 타고 세계 기록 도전을 지켜보려는 150명의 사람들이 기차에 올랐다. 승객들은 앞에서부터 6번째 카프리콘 열차에 탑승했다. 카프리콘 열차 1대당 여객칸 4칸으로 구성했으니 100개 중 20~24번째 열차칸 쯤 되겠다. 150명 중 80명은 세계 각국에서 온 기자들과 70명은 VIP들이었다.
고프로, 카메라, 휴대폰 등 촬영 장비를 확인하고 출발을 기다리는데 안내방송이 나왔다. 2시 출발 예정이었는데 맨 앞 기관차 카메라에 문제가 생겨서 출발을 지연한다는 내용이었다. 지연 방송에도 누구하나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캄캄한 터널 안 독일어,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등 각자의 언어로 설레는 마음을 표현하느라 시끌벅적했다. 2시 20분 드디어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터널이 끝나고 푸른 하늘과 고봉이 펼쳐지는 알프스 풍경이 펼쳐졌다.
월드 레코드 기차가 지나는 프레다역부터 알바뉴(Alvaneu)역 구간에는 하루 전부터 방송국 장비들이 늘어섰다. 선로 옆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지샌 사람도 있었다. 헬리콥터 2대, 드론 1대, 기차 내외로 카메라 19대를 설치해 현장상황을 실시간으로 내보냈다.
세계 기록에 도전하는 100량짜리 기차는 22개 터널, 48개 다리를 건너 총 24.9㎞를 달렸다. 2㎞에 달하는 기차에는 7명 기관사가 올라타 마치 한몸처럼 기차를 운행했다. 열차 운행을 준비하는 기간은 총 3개월. 3번의 실험을 진행하면서 최대로 연결한 기차는 4칸짜리 카프리콘 열차 16대였다. 3번째 실험이 성공하면서 여객칸 100대를 안전하게 움직이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증명을 했다. 레나토 대표는 “물리학적, 수학적 계산을 바탕으로 성공을 확신했다. 7명의 기관사가 동시에 움직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동시에 출발하고 동시에 멈춰야한다. 기관사들은 서로 케이블 전화로 소통하는데 2차 대전에서 사용하던 전화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기차는 약 시속 30㎞로 달렸다. 프레다(1788m)에서 시작해 알바뉴(999m)까지 100년된 아치형 고가교, 터널, 헤어핀 구간 등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기찻길을 부드럽게 달려나갔다. 래티셰반은 유례없는 이벤트를 기획하면서 계절도, 기차가 달리는 선로도 신중하게 골랐다. 미셸 파우카드(Michel Pauchard) 래티셰반 마케팅 담당자는 “황금색으로 물든 나무들 사이로 빨간 카프리콘 기차가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가을을 골랐다”고 설명했다.
월드 레코드 열차가 달리는 구간은 200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한 기찻길(알불라/베르니나 지역의 래티셰 철도)이다. 1904년 운행을 시작한 알불라 라인(투시스Thusis~생 모리츠St. Moritz)은 67㎞ 길이의 기찻길로 42개 터널과 144개의 다리를, 1910년 시작한 베르니나 라인(생 모리츠~티라노Tirano)은 61㎞로 13개 터널, 52개 다리를 지나면서 알프스를 넘나든다. 20세기 초 알프스 산악 철도 개발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차를 개통하면서 중부 알프스의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유네스코는 알불라/ 베르니나 지역의 래티셰 철도에 기술, 건축, 자연환경이 하나로 집약해 있다는 점을 인정해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기차가 어찌나 긴지 이리저리 휘어진 구간에서는 열차가 2줄, 3줄까지 겹쳐 보였다. 하루 전에도 이미 달렸던 구간인데, 월드 레코드 열차를 타고 보는 풍경은 사뭇 달랐다. 현지인들도 난리가 났다. 접근이 가능한 선로 주변마다 세계에서 가장 긴 기차를 구경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렇게 30분을 달린 열차는 베르군 역에 정차해 사람들을 내려줬다. 일단 반은 성공.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기차에서 내렸다. 프레다부터 베르군까지 찻길로는 6㎞인데, 기찻길로는 두 배인 12㎞에 달한다. 급경사를 내려오기 위해 산 능선을 빙빙 돌면서 기찻길을 냈기 때문이다.
베르군 들판에 마련한 월드 레코드 축제장에는 전 세계 15개국 이상에서 온 기자 120여 명과 추첨을 통해 초대받은 사람들 약 3000명이 있었다. 미셸은 “마케팅 홍보 효과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 지금 모두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다”며 격앙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대형 스크린을 통해 열차가 마지막 종착지까지 안전하게 운행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3시30분 열차가 무사히 알바뉴역에 도착하자 또다시 환호성이 터졌다.
이번 세계 기록에 도전한 래티셰반 철도는 1889년 설립했다. 스위스 내 3대 기차회사로 사설 철도 회사 중에서는 가장 큰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생갈렌(St. Gallen)주 자르간스(Sargans)에서 그라우뷘덴주 쿠어(Chur)까지의 노선을 제외한 그라우분덴주의 모든 철도 노선을 운영한다. 100% 수력발전으로 생산한 전기 에너지로만 기차를 운행하고 있다. 월드 레코드 행사에 사용한 카프리콘 기차는 행사를 종료하는 대로 곧장 분리해 일반 승객 운송에 투입했다.
※ 취재협조 = 스위스관광청
[쿠어(스위스) = 홍지연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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