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달러’에 휘청대는 선진국, 잘 버티는 신흥국

곽창렬 기자 2022. 11. 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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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처지 달라진 선진국·신흥국 통화

강(强)달러 앞에 전 세계 주요국 통화가 휘청거리고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안전하다’던 일본 엔화는 1달러당 150엔대로 올라서며 1990년 이후 32년 만에 가치가 최저로 떨어졌다. 유로화도 이른바 ‘패리티 라인(1유로=1달러)’이 무너지면서 20년 만에 1달러 아래로 내려왔다. 영국 파운드화도 감세안 파동으로 홍역을 치르면서 ‘1파운드=1달러’가 위태로워졌다. 기축통화 또는 준(準)기축통화 지위를 내세워 경제 위기 때마다 강세를 보였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반면 위기 때마다 휘청댔던 신흥국 통화는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다. 더크 윌러 시티그룹 신흥국 전략 총괄은 이에 대해 “머리를 긁적일 정도로 의아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선진국과 신흥국이 ‘킹달러’ 앞에 상반된 성적표를 받아든 이유는 무엇일까.

◇선진국보다 선방한 신흥국

세계 각국 통화 가치가 떨어진 것은 올해 들어 미국이 급격히 금리(0.25%→4%)를 올렸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미국 금리가 오르면 다른 나라 통화 가치가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경제 체력이 튼튼한 선진국이 더 큰 타격을 받고 있다. EU와 일본, 영국 등 세계 주요 6국 통화에 대비한 달러화의 평균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연초 95.97에서 지난달 25일 110.79로 15.4% 올랐다. 주요 6개 선진국 통화 가치가 달러화 대비 평균 15% 떨어졌다는 의미다.

반면 브라질 헤알화는 연초 1달러에 5.65헤알에서 지난달 31일 현재 5.3헤알로 환율이 6.2% 떨어졌다(통화 가치 상승). 글로벌 금융 위기 때인 2008년과 코로나 팬데믹이 발발한 2020년 통화 가치가 64%, 36%씩 폭락했던 것과는 딴판이다. 금융 위기 단골손님인 멕시코 페소화도 달러당 20.9페소에서 19.83페소로 5.1% 하락했다. 전쟁 중인 러시아 루블화도 환율이 16.4%(73루블→61루블)나 떨어졌다.

결국 올 들어 지난달 26일까지 유로존·영국·일본 등 선진국 6국의 달러 대비 통화 가치가 평균 16% 떨어지는 동안 브라질·인도네시아·대만·태국 등 신흥국 24국 통화는 14.2% 하락했다. 물론 신흥국 중에는 아르헨티나(-52%), 이집트(-47%), 터키(-39%)처럼 국내외 정치 상황 등으로 인해 큰 폭으로 통화 가치가 떨어진 나라도 있지만, 과거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놀랄 만큼 선방하고 있는 셈이다.

◇미리 올린 금리, 쌓아 놓은 달러가 버팀목

신흥국이 강달러 앞에서도 버티는 데는 지난해부터 일찌감치 금리를 올려놓은 영향이 컸다. 물가가 급등하자 선제적으로 금리를 올린 보상을 받고 있는 셈이다. 브라질의 경우, 지난해부터 물가가 두 자릿수 오르자 작년 초 2%이던 기준금리를 13.74%까지 끌어올렸다. 블룸버그통신은 “물가 상승에 대비해 올려놓은 금리가 쿠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같은 기간 멕시코도 기준 금리를 4%에서 9.25%로 올렸고, 헝가리는 1%에서 13%, 칠레도 0%대에서 11.25%로 올렸다.

반면 선진국은 상대적으로 더디다. 달러인덱스에 포함된 선진국 6국 가운데 미국보다 금리가 높은 나라는 없다. 일본은 -0.1%라는 마이너스 기준금리를 2016년부터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영국과 유로존은 기준금리를 뒤늦게 올리긴 했지만 아직 각각 2.25%와 2%에 불과하다.

게다가 경기 침체 우려와 부채 부담 때문에 금리를 크게 올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대신증권 공동락 연구원은 “신흥국은 물가를 낮추겠다는 목적과 함께 작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금리 인상 기조에 선제적으로 대응한 반면, 선진국은 금리 인상에 미적거리다 강달러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신흥국 외환 보유액이 과거보다 넉넉한 점도 통화 가치를 떠받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남미를 비롯한 신흥국은 1980년대부터 세계 경제가 흔들릴 때마다 외환 위기를 겪었다. 1994년에는 멕시코, 1999년에는 브라질 금융 위기를 경험했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도 1990년대 말 외환 위기로 큰 시련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외환 보유액의 중요함을 깨닫고 달러를 쌓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브라질의 외환 보유액은 2000년대 초반 300억~400억달러 수준에서 2010년대 후반 3900억달러까지 늘어났다. 같은 기간 멕시코는 400억달러에서 2000억달러로, 인도네시아도 200억달러에서 1400억달러로 외환 보유액을 늘렸다. 신한은행 오건영 부부장은 “과거처럼 달러가 부족했으면 또다시 신흥국에서 위기 얘기가 먼저 나왔겠지만, 지금은 20년 이상 달러를 차곡차곡 쌓아둔 덕에 환율이 오르면 외환시장에 내다 팔아 통화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막고 있다”고 했다.

◇환율 상승 효과도 신흥국이 유리

환율 상승(통화 가치 하락)에 따른 이익을 선진국보다 신흥국이 더 가져가는 상황도 신흥국에 호재로 작용한다. 일반적으로 환율이 상승하면 수출 물품의 가격이 내려가면서 수출이 증가한다. 그런데 선진국의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나 IT 제품이 환율보다는 기술력에 영향을 많이 받는 데 비해, 신흥국은 노동 집약적인 품목을 많이 수출하기 때문에 환율 상승 혜택을 더 크게 본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10년 이전까지 통화 가치가 1% 하락하면 주요 산업 수출이 0.71% 증가하는 효과를 봤지만, 2010년 이후에는 0.55%로 증가 폭이 줄었다. 산업연구원 강성우 연구원은 “과거 우리나라가 노동 집약적 저가 품목 수출에 주력하던 시절 환율 효과를 누렸는데, 현재 주요 신흥국도 비슷한 상황”이라며 “달러 강세가 가져다주는 수출 증가는 선진국보다는 신흥국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신흥국이 완전히 안심하기에는 이르다는 전망도 많다.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투자자들이 신흥국 시장 채권 펀드에서 빼낸 자금이 700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JP모건이 관련 수치를 집계하기 시작한 2005년 이후 최대 유출 규모다.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은행 마렉 드리말 전략가는 블룸버그에 “올해 남은 기간 신흥국 통화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미국 연준의 긴축이 끝나고 미국과 세계경제가 연착륙해야 신흥국 시장이 매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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