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나눠주고 청소하고…시민이 지키는 ‘이태원역 1번 출구’

이홍근·권정혁·최서은 기자 2022. 11. 3.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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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역 앞 추모공간’ 관리하는 자원봉사자들
지난 2일 오후 늦은 시각 ‘이태원 핼러윈 참사’ 추모공간이 마련된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서 한 시민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연령·직업 다양…추모 질서유지 돕고, 외국인 안내해
국화 싣고 온 꽃집 주인 “차마 돈 받고 팔 수 없었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다음날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은 휑했다. 음악과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골목은 지난달 29일 오후 10시부터 비명과 울음으로 채워졌다. 30일 새벽까지 이어진 시신 수습 때는 경찰관과 소방관들이 골목을 채웠다. 유족들이 실종된 가족을 애타게 찾던 30일 낮 12시, 여행가 A씨(60)는 경북 영양군에서 첫차를 타고 상경해 골목과 인접한 지하철역 출구 앞에 꽃 한송이를 놨다. 추모객들은 A씨가 둔 꽃 옆에 술과 음식을 올렸다. 이렇게 이곳은 시민들의 추모공간이 됐다.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추모공간은 시민들이 만들고 직접 관리하는 공간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는 용산구 녹사평역이나 중구 서울광장 합동분향소와 다르다. A씨를 비롯해 자원봉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주변 정리를 하고 있다. 추모객들이 몰릴 때는 줄을 세워 질서도 유지한다. 새벽 시간 노숙인들이 추모공간에 놓인 술과 음식, 담배를 가져가며 어지르면 수습하는 일도 봉사자들 몫이다.

A씨는 30일부터 매일 오전 5시쯤 이곳에 나와 오후 11시쯤 집으로 돌아간다. 하루 종일 서 있다 보니 다리가 퉁퉁 부어 함께 추모공간을 지킬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했다고 한다.

A씨는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 1번 출구 앞에 걸어뒀다. 기자는 지난 2일 오후 6시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A씨를 도와 봉사했다.

기자는 2일 오후 6시12분 ‘추모공간 (정리) 자원봉사자 모집’ 공고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수화음이 채 3번도 울리기 전에 A씨가 전화를 받았다. “추모공간 유지를 돕고 싶다”고 하자 “고맙다”고 했다. 그는 “3일간 서 있느라 다리가 하도 부어서 잠시 쉬고 있는데 오후 7시부터 합류하겠다”고 답했다.

현장에는 이미 4명의 자원봉사자가 있었다. 논현동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김서준씨(35)는 ‘자원봉사자’라고 적힌 목걸이를 걸고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 국화꽃을 손질해 헌화객들에게 나눠줬다. “차마 꽃을 팔 수가 없었다”는 김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꽃집에서 국화를 상자째로 공수해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준비한 국화꽃이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동이 났다. 이내 김씨는 국화꽃 100송이가 든 상자를 새로 가져왔다.

다른 자원봉사자들은 추모객들을 상대로 질서유지를 했다. 20대 청년 B씨는 “오후 4시부터 나와 조문하러 온 시민들을 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 추모객에게는 유창한 영어로 추모 순서를 안내했고, 한국인 추모객에게는 친절한 말투로 질서를 지켜달라고 했다.

시민이 만들어 관리하는 공간이지만 무질서는 없었다. 자원봉사자들의 지휘에 맞춰 시민들이 줄을 섰고, 차례가 오면 조용히 추모를 하고 빠져나갔다. 헌화 후에는 캔 음료를 따서 두고 가는 시민, 소주를 따르고 가는 시민, 건어물이나 캔 과일, 과자 안주를 두고 가는 시민도 있었다. 시민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인들을 애도했다.

이홍근·권정혁·최서은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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