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모를 아픔 보듬으니… 새로운 가족 보이더라

권이선 2022. 11. 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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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BIFF 초청作 ‘고속도로 가족’ 개봉
기우네 구걸로 휴게소서 ‘기생’
연민 느낀 영선 ‘거금’ 주지만
상습 구걸 알고 경찰에 신고
남은 식구 가여워 직접 돌봐
행복·불행 뒤섞인 삶 속에도
누군가 선한의지로 변화 초래
이상문 감독 “가족은 정서 유대
사람 사이 온기 전하고 싶어”
영화 ‘고속도로 가족’은 노을 진 하늘, 그 아래 함께 걸어가는 네 식구 모습으로 시작된다. 길이 아닌 곳을 걷고, 집이 아닌 곳에서 자고, 스쳐 지나가는 곳인 고속도로 휴게소에 머무른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휴게소 한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달빛을 벗 삼아 춤추는 가족. 삶을 유랑하는 이들 모습은 낭만적이고, 따스하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역시 인생은 비극이다. “지갑을 잃어버려서 그러는데, 2만원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빠 기우(정일우 분)는 아이들과 만삭 아내 지숙(김슬기)을 앞세워 휴게소 이용객들에게 돈을 빌려 생활한다. 영선(라미란) 역시 기우네 가족에 속아 7만원이라는 거금을 건넨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가족은 오랜만에 휴게소 식당에서 만찬을 즐긴다.

그러나 단속반과의 실랑이로 부러진 텐트처럼 행복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다. 영선은 기우가 같은 수법으로 다른 이들로부터 돈을 얻어내는 걸 목격하고 경찰을 부른다. 기우가 구치소에 갇히자 영선이 남은 가족들을 거두어 자신과 남편이 운영하는 중고가구점으로 데려오면서 두 가족의 위태로운 동거가 시작된다.
지난 2일 개봉한 영화 ‘고속도로 가족’은 모두가 스쳐 지나가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자리를 잡은 기우(정일우)와 가족을 그린 작품이다. ‘인생은 놀이, 삶은 여행’인 것처럼 즐겁게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머물 곳이 필요한 ‘고속도로 가족’에게 영선(라미란)이 손을 내밀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설렘, 고고스튜디오 제공
삶은 야속하지만, 그래도 희망은 피어난다. 지난 2일 개봉한 ‘고속도로 가족’은 삶의 궤도 바깥에 사는 기우 가족과 남모를 아픔을 간직한 영선 가족이 서로를 보듬는 과정을 그린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학대, 방치가 공존하는 아이러니는 가족의 가치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그러나 감독은 행복과 불행을 명확히 나누지 않는다. 고속도로 휴게소를 전전하는 가족 모습은 때로는 행복이고, 때로는 불행이다. 화마로 이어지는 엔딩 역시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행복과 불행이 형체 없이 뒤섞인 것이 삶이지만 분명한 것은 누군가의 선한 의지는 변화로 나아가는 길이 된다.

영화는 올해 개봉했던 ‘브로커’, ‘말임씨를 부탁해’ 등 작품처럼 새로운 가족 모습을 제시한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순환한다”는 대사처럼 붕괴한 두 가족은 전통 가족 개념에서 더 나아가 한 가족으로 재탄생한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이들 모습은 “가족의 의미는 혈연관계가 아닌, 정서적 유대”라는 이상문 감독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영화는 대안가족 외에도 노숙인 실태, 참사 유가족 모습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비추며 질문을 던지는데, 답은 역시나 온정이다. 이 감독은 “세상살이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그래도 느껴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가 된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 파노라마 부문에 공식 초청됐던 이 작품은 프리미어 당시 관객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그간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진 채 작심 연기를 선보인 배우들 덕분이다. 가장 파격적인 변신을 한 배우는 정일우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꽃미남 이미지가 강했던 정일우는 2007년 ‘내 사랑’ 이후 15년 만에 영화 주연으로 나서면서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등장인물 중 가장 감정 변화가 크고, 정신병력이 있는 노숙인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소화했다. 메이크업은 물론, 면도도 하지 않았다. 정일우는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끝과 끝의 감정에 어디까지 치달을 수 있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직한 후보’, ‘걸캅스’ 등 명실상부한 ‘코미디 여왕’ 라미란은 슬픔을 가슴에 얹고 사는 엄마 역할로 영화 중심을 탄탄히 잡았다. ‘SNL 코리아’ 등을 통해 유쾌하고 코믹한 캐릭터를 주로 선보였던 김슬기도 연기 변신을 했다. 그는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고단한 삶을 버텨내는 지숙이라는 인물을 통해 많은 대사 없이도 관객들 마음을 울린다.

3∼4개월의 오디션을 거쳐 캐스팅됐다는 아역 배우 서이수, 박다온은 자칫 어두워질 수 있는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특히 서이수는 어른들 아픔의 무게를 짊어지고 애어른이 된 은이의 얼굴을 그려냈다.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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