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 칼럼] 예술가의 학위

한겨레 2022. 11. 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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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익 칼럼]우리가 다빈치며 베토벤 같은 위대한 예술가를 존경하며 그 사회적 위상도 그만큼 높았으려니 하지만 예술사회사는 예술가들의 창조적 자유가 존중된 것이 채 두 세기도 안 된 근대 시민사회 이후로 접어 보고 있다. 그 전에는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 하더라도 귀족이나 교회에 예속되어 주인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하인보다 좀 높은 중인쯤의 계층에 속했다.

김병익 | 문학평론가

무심코 튼 텔레비전에서 클래식 음악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출연자가 드디어 피아노 이중주로 베토벤의 심포니를 연주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운명’을 피아노 연주로는 처음 들어보는데 그 교향악의 다성적인 효과가 두 피아니스트의 네 손 연주로 뜨겁게 살아나고 있었다. 이 색다른 프로를 여전히 기억하는 참에 후배의 소개로 그 연주자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김대진 박사였다. 내가 그저 ‘피아니스트’라고 하지 않고 ‘음악 박사’란 익숙지 않은 학위를 밝힌 것은 그의 명함에 적힌 직함대로 옮겼기 때문이다.

고전음악 연주가가 흔하지 않은 학위를 자기 명함에 밝힌 이유는 그분과의 대화에서 곧 짐작되었다. 국제적으로 저명한 콩쿠르에 많은 입상자를 배출하고 있는 이 학교 책임자로서 그는 이 대학이 석·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음악도든 연극 지망생이든 무용과 학생이든 그들도 일정한 과정을 마치면 마땅히 일반대학교처럼 석·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화제는 좀 의외였지만 그 논지는 매우 당연한 주장을 그 자리에서 들었다.

내가 예술가도 소정의 교육과 연구의 과정을 마치면 그에 합당한 학위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들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작고한 이강숙 선생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교장으로 재임하던 때의 어느 사석에서 학부형들이 자녀들에게 마땅히 학위가 수여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를 했다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그때의 이강숙 선생은 예술가에게 굳이 석·박사 학위를 붙여야겠느냐는 부정적인 의견이 스민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30년 뒤의 한예종 총장 김대진 박사는 과정을 통과한 예술가에게 학위를 수여하고 석·박사의 존칭으로 대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분명하게 개진하고 있었다.

한 세대 동안 예술가들의 사회적 위상 변화가 예술가들 스스로에 의해 표명되고 있는 것을 그때 나는 확인했다. 나만 해도 문학인들이 소설가나 시인이면 충분하지 싶은 생각이 근래 변하고 있음을 느끼는 중이었다. 창작집이나 비평집의 필자 소개에 ‘박사’라는 호칭이 붙어 있으면 그가 드러내는 예술적 재능에 학문적 이론적 배경이 덧붙어 그의 작품에 지적 품위가 테크닉만이 아니라 지적 내면으로도 더욱 풍요롭겠다고 다시 살피는 습성을 은연중에 보태고 있었던 것이다.

문학의 창조적 능력이 학문적 이력으로 더 깊고 풍성해지겠다는 순진한 이유만으로 든 생각은 아니었다. 오늘날의 예술 창작과 실연이 예능적 재능에만 의지하지 않고 이론적 지적 정신의 자산이 은근히 깔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나는 받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예술에 대한 낭만적인 감수성에만 의존하던 시대는 지나고 있을 것이었다. 엘리엇의 <황무지>처럼 각주가 많이 붙은 시도 떠올랐고 4·3 사태에 대한 소설을 읽으며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해방 후의 우리 역사 지식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일이 기억되었다. 임옥상의 그림에서 현실에 대한 인식을, 조성진의 피아노 터치에서 내면적 지성을 느끼기도 했었다. 이제 예술도 실제로 진지한 현실 의식과 지적 접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술가에게도 ‘박사’라는 호칭이 필요하고 그걸 자연스러워하는 때가 된 것이리라. 현대의 예술은 전시대보다 더 진하게 내면적 지성을, 비판적 인식을 함축해야 했다.

우리가 다빈치며 베토벤 같은 위대한 예술가를 존경하며 그 사회적 위상도 그만큼 높았으려니 하지만 예술사회사는 예술가들의 창조적 자유가 존중된 것이 채 두 세기도 안 된 근대 시민사회 이후로 접어 보고 있다. 그 전에는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 하더라도 귀족이나 교회에 예속되어 주인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하인보다 좀 높은 중인쯤의 계층에 속했다. 우리나라에서처럼 서양의 화려한 예술사회에서도 작가는 비서, 음악가는 귀족의 파티에 흥을 돋우는, 화가는 집이나 성당의 치장을 하거나 초상화를 그려주는 예인에 불과했다. 이런 예술가들이 독립적인 위상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혁명 이후였다. 귀족 계급이 와해되면서 예술가들은 스폰서, 정확히는 그 고용자를 잃게 되고 그 스스로의 살길을 찾아야 했다. 예술의 자유, 예술가의 독립성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여기서부터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사줄 새 물주를 찾아야 했고 그 물주는 불행히도 자신들보다 교양과 문화의 수준이 낮은, 그러나 돈을 가진 부르주아였다. 이 어긋남에서 예술의 자유와 독립이 추구되고 창조적인 개성과 재능이 평가된 것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가 개교할 때만 해도 예술가들은 천부적 재능으로 실기훈련을 통해 미적 표현을 얻을 수 있으면 된다는 고전적 관념이 지배하던 시절이었지만 한 세대가 지난 이제 우리 사회도 예술의 이론화·교과화로 객관적 인증을 받아야 하게끔 변모한 듯하다. 장인예술도 필요하지만 이론적 무장도 필요해진 것이다. 한예종이 이 변화에 맞닥뜨린 듯하다. 이강숙 초대 총장 시대의 고전적 예술가 인정이 이제 21세기적 신세대다운 현실적 활용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들은 연주자도 박사, 실연자도 석사여야 더 평가받는 시대의 예술가들이 된 것이다. 예술학교는 실기만이 아니라 이론도 가르치고 학생은 저명한 연주가에게 사사도 하며 연구와 공부로 자기 예술관을 다져야 했다. 예술학교들도 일반대학과 다름없는 소정의 과정을 거쳐 석·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어야 하게 된 것이다. 마침 미국에서 온 친구에게 물어보았는데 대답은 분명했다. 친척 아들이 줄리아드 출신인데 음악학 박사라고 했다. 예술학교이지만 과정은 실기와 이론 2개 트랙으로 함께 교육이 진행되어 그 학위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실기훈련도 있어야 하고 그 아름다움이 어떻게, 왜 아름다운지, 그 역사는 어떻게 변해왔는지 학문적 탐구도 해야 할 것이다. 미학이 오래전부터 독립 학과로 성립된 것이 그 때문이겠지만 우리가 예술과 현실의 관계 연구를 설정한 예술사회사로써 이론적 관심을 키운 것도 두 세대 이전부터였다. 내 생각은 여기서 현대 예술가들이 처한 현실적 위상으로 번져갔지만 한예종 총장의 고민은 그 위상 정립을 위한 실제 문제였다. 돈이 되지 않아 쓸모없게 되거나 자본주의화한 예술계 현실에 대해 우리 사회도 진지하게 고민하며 생계에 무력한 예술의 가치를 실제화하기 위해 정부와 교육기관이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구체적으로 고려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 숨 막히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숨 쉴 수 있는 힘을 앗겨버린 젊고 맑은 영혼들에 삼가 서러운 애도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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