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마주하다

한겨레 2022. 11. 3.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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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가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고, 더 많은 이가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목도했다.

특히 꽁꽁 언 발트해에서 함께 스케이트를 타던 중 얼음이 깨져 목숨을 잃은 남동생의 죽음은 그가 앓았던 우울의 병인이 됐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동생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는 그를 내내 옥죄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지만, 야스퍼스는 죽음으로 종결된 현상 그 자체를 마주할 것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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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해변의 수도승(Monk by the Sea)>, 1808~1810, 캔버스에 유채, 110×172㎝,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

[크리틱] 강혜승 | 미술사학자·상명대 초빙교수

많은 이가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고, 더 많은 이가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목도했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말처럼 곁에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이의 부재, 그 상실로 고통스러웠던 각자의 시간이 흘렀다. 얼마만큼 시간이 더 지나야 떠난 이의 빈자리를 마주할 수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특히 자녀를 잃은 부모의 마음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출입금지구역이라고 할 정도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이다.

한 화가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던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다. 독일 북동부 그라이프스발트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었고, 이듬해 여동생을 잃었으며, 눈앞에서 남동생을 잃기도 했다. 비극은 누나의 죽음 이후 끝나는 듯했지만, 가족의 잇따른 죽음은 그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특히 꽁꽁 언 발트해에서 함께 스케이트를 타던 중 얼음이 깨져 목숨을 잃은 남동생의 죽음은 그가 앓았던 우울의 병인이 됐다. 물에 빠진 형 프리드리히를 구하려다 숨졌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동생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는 그를 내내 옥죄었다.

그의 1809년 작 <해변의 수도승(The Monk by the Sea)>은 프리드리히가 죽음을 마주했던 방식을 보여준다.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대한 하늘은 구름이 가득 차 어둑한데 회색 하늘 아래 맞닿은 바다는 얼어붙을 듯 차가운 검은빛이다. 물결의 흰 거품은 곧 불어닥칠 위협적인 파도를 예고한다. 광대한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이 이루는 끝없는 수평선 앞에 작고 작은 인물이 좁은 모래언덕 위에 서 있다. 수도승이라는 제목으로 미루어 작품 속 인물은 검은 바다를 보며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절망을 신에게 질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의 배경은 독일 북부 발트해에 있는 뤼겐 섬으로, 프리드리히가 자주 여름을 보내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 세상 끝에 홀로 선 수도승은 지독히도 고독했던 화가의 자화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동시에 그 미약한 존재는 관객인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작품을 자세히 보면 검은 바다를 바라보고 선 인물은 등을 돌린 채다. 관객은 통상의 작품에서처럼 제3자의 시선으로 인물을 마주할 수 없다. 우리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허공이나 다름없는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 죽음이라는 섭리 앞에 선 무력하고 미약한 우리의 모습인 셈이다.

프리드리히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내내 황량한 독일 풍경을 통해 죽음을 말해 왔다. 그저 한 폭의 풍경이 아닌 죽음을 대하는 낭만주의적 시선이다. 이때의 낭만주의는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자는 호소다. 프리드리히의 풍경에서처럼 대자연 앞에서 고양되는 나약한 인간의 감정은 미와 다른 차원의 숭고함으로 표현된다. 정념을 고통과 쾌로 나눈다면 숭고는 고통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예컨대 생과 사가 영원히 유전하는 무한한 자연 앞에 불가항력의 인간은 완전히 압도되고야 마는 두려움과 같다.

프리드리히는 인간의 제한된 이성과 우주의 무한성 사이의 틈을 메우는 숭고한 낭만으로 죽음을 마주했다. 대자연 앞에서 죽음을 묻는다는 건 생의 의미를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독일 사상가 카를 야스퍼스(1883~1969)의 철학을 빌리면, 삶의 끝이 아닌 삶의 한가운데서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다시 삶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지만, 야스퍼스는 죽음으로 종결된 현상 그 자체를 마주할 것을 청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의미다. 이는 죽음이 파괴한 것은 현상일 뿐 사랑하는 이의 존재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은 자의 삶 속에서 고인과의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는 믿음의 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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