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의 날',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날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

2022. 11. 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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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소녀의 초상
비톨트 프루츠코프스키, '위령의 날'. 1888년, 캔버스에 유채, 105.5 x 63cm, 바르샤바 국립 미술관, 폴란드

19세기 폴란드의 상징주의 화가 비톨트 프루츠코프스키(Witold Pruszkowski)가 그린 유령 소녀의 초상화다. 이 그림은 을씨년스러운 시골 공동묘지의 풍경을 묘사한다. 텅 빈 마을 묘지에 서서히 어둠이 떨어지고 있다. 하늘 한편에 아직 황혼의 흔적이 보이지만 점차 짙은 푸른색으로 변하고 있고, 무덤가는 차갑고 습한 저녁 안개에 잠겨 있다. 창백한 하늘을 배경으로 들쭉날쭉 가지를 뻗은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다.

수직의 화면 중앙에 한 소녀의 유령이 반쯤 앉은 자세로 무덤 위로 솟아오른다. 긴 상아빛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상반신이 비교적 견고한 형태를 드러낸 반면, 하반신은 연기같이 곧 사그라들 듯한 비물질성을 보여줌으로써 그녀가 혼백임을 암시한다. 소녀는 예상치 못했던 누군가와 시선이라도 마주친 양 겁먹은 표정으로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다. 묘 주변의 잡초와 야생화, 깜박이는 작은 촛불, 크고 작은 십자가들, 거친 버드나무,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은 유령의 존재와 함께 싸늘한 초자연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품의 제목인 '위령의 날(All Souls’ Day)'은 무엇인가? 가톨릭과 여러 기독교 교파의 축일로,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11월 2일, 사자는 무덤에서 나와 산 자들의 세계를 방문한다. 이날, 유럽과 영미권 나라들에서는 묘지에 촛불을 켜고 꽃을 장식하며 죽은 이를 추모한다. 집으로 돌아올 영혼을 위해 방을 따뜻하게 하고 탁자에 케이크를 올려놓거나, 해 질 녘 무덤가로 가서 성수나 우유를 붓는 등 지역에 따라 제각기 독특한 이벤트를 한다. 그림 속 장면은 그날을 보여준다. 화가의 나라 폴란드에서도 위령의 날은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전통이었다.

위령의 날(11월 2일)은 핼러윈(10월 31일), '모든 성인 대축일(All Saints' Day, 11월 1일)'과 함께 죽은 자와 관련된 축제일이다. 셋 모두 고대 켈트족의 '삼하인(Samhain) 축제'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500년경, 영국과 아일랜드, 프랑스 북서부 지방에 살던 켈트족은 일 년을 열두 달이 아닌 열 달로 본 달력을 사용했고, 한 해를 여름과 겨울로만 구분했다. 여름은 10월 31일에 끝나고, 11월 1일이 겨울이 시작되는 날이자 새해 첫날이었다. 이때는 사자의 영혼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어 쉽사리 우리 세계에 들어올 수 있는 시기로 여겨졌다. 겨울의 시작은 본질적으로 만물이 소멸하고 죽어가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켈트족은 사람들과 가축이 혹독한 겨울에 살아남을 수 있도록 영에게 빌었고, 그것이 해를 끼치지 않도록 집 밖에 음식을 두어 대접했다. 무서운 귀신 복장을 하고 집안을 차갑게 만들어 죽은 자의 영혼이 몸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도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유령과 악마로 분장하고 집집을 다니며 시와 노래를 낭송하고 음식을 받았다.

켈트족을 정복한 로마인은 그들의 삼하인 축제를 받아들였다. 이후, 고대 로마에는 기일에 산소에 모여 죽은 이를 추도하며 헌주하고 음복하는 관습이 생겼다. 6세기 무렵, 초대교회 역시 교세를 확산하기 위해 켈트인의 토착 문화인 삼하인을 기독교적으로 수용했다. 멕시코에는 핼러윈, 혹은 위령의 날과 비슷한 축일인 '망자의 날(Day of the Dead)'이 있다. 망자의 날은 죽음의 여신 믹테카키후아틀을 숭배하는 아즈텍족의 전통 의식과 가톨릭 문화가 융합된 것이다. 집안에 제단을 설치해 사자의 사진, 꽃, 초를 놓아두고 '망자의 빵'과 설탕으로 만든 해골을 먹는다. 동아시아식 망자의 날은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베트남에서 지내는 '백중' 행사다. 불교에 뿌리를 두지만, 도교와 각국의 풍속들이 뒤섞여 형성된 망자의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이를 추모하는 세계 곳곳의 기념일들은 각 시대와 지역의 사람들이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삶은 죽음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기 때문이다. 죽음에는 순서도 없다. 예고 없이 갑자기 닥치기도 한다. 산 자들 주변에는 항상 그들과 관련된 가족, 지인, 친구들의 죽음이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전생과 사후의 삶, 그리고 죽은 자의 영혼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는 다수의 문화권과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믿음이다. 이런 신념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거나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때 깊은 위안이 된다. 비록 혼령이 두렵고 섬뜩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의 존재는 죽음 이후의 삶이 있고 사후 세계에서 아끼는 이들과 재회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망자를 기억하고 기리는 관습이나 축제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이태원에서 발생한 핼러윈 축제 참사를 두고, 일부 기독교계를 비롯한 사회 일각에서 외국의 귀신 축제를 무분별하게 따라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모든 문화는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 융합, 발전해가는 과정을 거친다.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는 더욱이 토착 문화만을 고집할 수 없다. 이날은 사람들이 잠시 현실의 무게를 내려놓고 삶의 재미와 해방감을 즐길 수 있는 하루이기도 하다. 핼러윈을 사악한 이교도 문화, 상업주의에 물든 타락한 문화라고만 본다면, 이는 인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가 빚어낸 편협한 사고라고밖에 볼 수 없다. 아는 만큼만 보이는 법이다.

피해자를 탓하고 조롱하는 SNS 게시물이나 기사 댓글의 광포함은 어떤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참담한 고통을 겪고 있는 희생자 가족뿐 아니라 집단적 트라우마에 빠진 우리 모두를 아프게 한다. 참극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 돌리고 희생양으로 바칠 마녀를 색출하려는 듯한 비이성적 여론몰이 기류도 감지되고 있다. 핼러윈이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다. 몇몇의 핼러윈 악당이 그런 것도 아니다. 참사를 막지 못한 정부와 지자체, 경찰당국의 안이하고 허술한 대응 탓이다. 이들의 책임을 엄중히 묻고 차후 확고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가족분들께 애도를 표합니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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