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짙은 가을밤… `베르디의 바리톤`이 된 두남자
바리톤 주역인 오페라 '리골레토' 주연 맡아
실제로 딸자식 있어 '딸 둔 아버지'役 공감
"국내단체들 의상·분위기 비슷한 점 아쉬워"
월간객석과 함께하는 문화마당 바리톤 유동직 & 양준모
베르디에게 명성을 안겨준 '리골레토'는 테너가 주역을 맡는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이례적으로 바리톤이 중심이 되는 오페라이다. 서울시오페라단 '리골레토' 무대에 서는 유동직과 양준모에게는 닮은 점이 많다. 1999년 독일에서 데뷔해 슈투트가르트 슈타츠오퍼 주역 가수로 활약한 바리톤 유동직은 2020년부터 단국대에서 후학을 양성 중이다. 2007년 오스트리아에서 데뷔해 드레스덴 젬퍼오퍼에서 주역 가수로 노래한 바리톤 양준모는 2018년부터 연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유동직은 "바리톤에게 '리골레토'는 내가 지금 어디쯤 와있나 확인할 수 있는 척도"라고 한다. 양준모는 최근 '리골레토' 연습을 시작하며 "이번 작품을 통해 나를 좀 더 조여보자"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다고 한다. 한창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두 바리톤과 세종문화회관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베르디는 바리톤의 역할을 중요시했던 작곡가입니다. 베르디의 오페라를 잘 부르는 바리톤을 특별히 '베르디 바리톤'이라고 얘기하기도 하죠.
△유동직 "벨칸토 시대에는 주역 소프라노가 드라마를 이끄는 주동 인물이었다면, 베르디는 그 역할을 바리톤에게 부여한 작곡가예요. 베르디가 없었다면 많은 바리톤이 슬펐을 거예요."
△양준모 "많은 바리톤이 굶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웃음) 그런데 베르디의 바리톤은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역할은 아니에요. '리골레토'에서 바리톤은 1~3막까지 계속 등장하는데, 발성의 체계가 잡혀 있어야지만 작품에 도전할 수 있죠."
-바리톤의 매력을 실컷 즐길 수 있는, 바리톤의 진가를 살펴볼 수 있는 오페라 작품을 소개해 주세요. '리골레토'를 제외하고요!
△양준모 "'오텔로'를 하다 보면 베르디가 바리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어요. 바리톤으로 무대 위에서 할 수 있는 선과 악을 다 표출한 것 같아요. 바그너 작품도 추천하고 싶고요."
△유동직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님이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한국이 클래식 음악 강국은 아니고, 클래식 음악 교육 강국"이라고 얘기를 하시더군요. 정말 공감했어요. 많은 선수층을 보유하고 있지만, 듣는 이들은 선수층만큼 두텁지 않으니까요. 이번에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4부작(만하임 극장 프로덕션)을 올렸는데요. 이를 계기로 바그너 오페라의 저변도 넓어지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유럽에서 베르디 작품을 많이 했는데요. 제가 해본 작품 중에는 '오텔로' '맥베스' '시몬 보카네그라'가 최고인 것 같아요."
-바리톤 주역 오페라인 '리골레토'는 어두운 색채가 지배하고 있는데요. 리골레토는 어떠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나요?
△유동직 "이번 공연에선 두 명의 리골레토를 만날 수 있을 텐데요. 저와 양준모 선생이 그동안 여러 '리골레토'를 경험해왔으니 더 재밌을 것 같아요. 단지 많이 불러서 기술적으로 능숙한 것보다는, 리골레토라는 인간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찾아봤을 거니까요. 제가 '리골레토' 공연에 이번이 80번째 서는 거더라고요. 그동안 다양한 연출가와 함께 했는데, 이번 공연도 장서문 연출가가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 같아 기대가 커요."
△양준모 "저도 딱 세어보진 않았는데 '리골레토'는 프로덕션만 5~6개, 무대는 50~60개 섰을 거예요. 그렇게 해도 또 두려워요. 하다 보면 감정에 치우칠 때가 있는데요. 이 작품은 거기서 딱 브레이크를 밟아야 해요. 공연이 잘 지나갔다고 안심해도 다시 들어보면 음정이 틀리거나 고음이 안 나고…. '리골레토' 악보가 너덜너덜해졌는데 그걸 못 버리겠더라고요."
◇다양한 경험 속에 변화하는 '리골레토'
-극중 리골레토는 딸 질다를 둔 아버지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리골레토를 대하는 마음이 조금 달라졌는지도 궁금합니다.
△양준모 "저도 딸을 키우고 있어요. '리골레토' 첫 데뷔가 2007년이었는데, 당시 레슨을 해주시던 선생님이 "네가 자식을 낳고 성장하는 과정을 본다면 이 캐릭터가 좀 다르게 느껴질 거다"고 얘기해 주셨어요. 2019년에 '리골레토'를 공연하는데 마지막 질다가 죽는 장면에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여태껏 그런 적이 없었는데…. 질다를 제 쪽으로 끌어당길 때도 진짜 자식처럼 손에 힘을 꽉 주게 되더라고요."
△유동직 "저도 아들과 딸이 있어요. 공교롭게도 '라 트라비아타' 데뷔할 때 아들이, '리골레토' 데뷔를 앞두고 딸이 태어났어요. 그래서 이 작품을 할 때마다 아이들이 생각나죠. 물론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베르디 작품 내용처럼 극적인 상황은 많이 없을 거예요. 사소한 일인데, 딸의 귀가 시간에 대해 간섭하다 보면 가끔 화가 나잖아요. 그런 일상적 감정을 증폭시켜서 무대에서 전달하는 게 관건인 것 같습니다."
-이번 작품은 베르디 작품에 흐르는 메시지를 현대적인 코드로 풀어낼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그동안 독일에서 활동하면서 다양한 레지테아터 연출(연출가 중심의 오페라 프로덕션)을 경험하셨죠? '리골레토' 중 인상 깊었던 해외 프로덕션을 알려 주세요.
△양준모 "'리골레토'를 아버지와 딸의 사랑이 아닌, 나치와 반(反) 나치로 나눠서 재해석한 프로덕션이 있었어요. 딸이 죽을 때에도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것처럼 총을 사용했고요. 독일에서 히틀러에 대한 얘기는 금기시되어 있는데, 이 작품을 올려도 되나 제가 다 걱정이 되더라고요. 연출가에게 물어봤는데 무대에선 상관없다고 했어요."
△유동직 "슈투트가르트 슈타츠오퍼 작품인데요. 리골레토가 딸을 '남장 여자'로 키워요. 실제로 톰보이 옷을 입은 질다와 권투를 하며 이중창을 부르죠. 그 모습에서 리골레토가 평생 마음에 담아 두었던 근원적 증오가 보였어요. 그를 둘러싼 공포가 딸을 그렇게 키우도록 만든 거죠. 어떤 연출가의 세계관이든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있어요."
-만약 내 생각이 연출가의 해석과 다른 경우에는 어떻게 하나요?
△양준모 "무조건 내 방식을 따르라고 얘기하는 연출가는 못 봤어요.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 그들은 설득하려고 노력해요."
△유동직 "저는 우선 해 봐요. 납득이 안 갈 정도로 신기한 연출을 많이 접했는데요. 마음에 설득이 안 되면, 연출가와 맥주 한잔하면서 대화를 하고, 리허설 때도 의견 교환하는 시간을 가져요. 독일은 리허설 시스템이 훨씬 다양하니까 의견을 주고받을 기회도 많습니다."
-국내 오페라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일 텐데요. 한국에 들어와서 오페라 무대에 섰을 때, 답답한 부분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양준모 "한국에 들어왔는데 누군가가 '오페라는 이래야 돼'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더라고요. 갈등이 싫어서 굳이 다른 얘기를 덧붙이진 않았지만, 그래서인지 국내 오페라는 단체는 다른데 의상과 무대 분위기가 다 비슷해요. 관객에게 볼거리를 많이 주어야 하는데 말이죠."
△유동직 "이런 사고를 가진 성악가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이제 저와 양 선생처럼 유럽 시스템을 겪어 본 사람들이 교편을 잡고 있으니, 학교 오페라부터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이번 '리골레토'는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609석)에 오르니 색다른 즐거움을 줄 것 같아요. 대형극장에 비교하면 소극장 크기인데, 그럴수록 섬세한 연기에 신경을 써야 해요. 극적인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공연이 될 것 같습니다."
-독일의 극장들도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다고도 하더군요. 이러한 재정난으로 젊은 성악가들의 기회도 위축되고 있습니다.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젊은 후배들에게 애정 어린 조언을 해준다면?
△유동직 "독일에서 1999년에 데뷔했는데요. 당시에는 독일에서 성공하고 한국에 와야지 하는 생각도 없었어요. 목표는 무조건 독일에서 살아남는 거였죠. 결국 한 명의 훌륭한 성악가는 극장이 만드는 거예요. 극장 시스템 안에서 다양한 무대 경험을 쌓아야하는데, 한국에는 무대 기회가 적으니 독일에서 경력을 쌓는 거죠. 젊은 성악가들이 조금 긴 호흡으로 미래를 바라보면 좋겠어요. 미디어 매체에 일찍 노출되다 보니 빨리 뭔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성악가는 목에는 마이크를 넣고, 몸에는 스피커를 넣고 트레이닝 하는 거예요."
△양준모 "제가 유학 갈 때 선생님께서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승자다"라고 하셨어요. 콩쿠르 나가서 상을 받고 오페라 출연 계약서를 받으면 끝나는 줄 알았죠. 막상 극장에서 오페라를 하다 보니 끝이 안 보이는 거예요. 정말로 무대가 우리를 키우는 거죠. 지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다들 미디어로 눈을 돌리려 해요. 어려워도 독일에서 끝까지 버텨서 좋은 음악가가 되면 한국에 돌아오면 무대가 많아져요. 그런데 다들 그 수련 기간을 못 참더라고요."
△유동직 "무대는 절대 안 없어질 거예요. 젊은 성악가들이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글=월간 장혜선기자·사진=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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