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눈 떠보니 후진국
의사 결정권자 안일함·위기 불감증 등
이태원 참사·금융시장 별반 다를것 없어
선진 사회·경제라 믿었던 민낯 드러나
제대로 원인 분석하는 게 애도의 시작
이태원에서 벌어진 핼러윈 압사 참사가 우리 사회의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영화라고 해도 믿기 힘든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저 멀리 바다도 아닌, 지하철만 타면 쉽게 갈 수 있는 그곳에서 꽃다운 이들을 허무하게 잃었다는 사실은 지금 이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눈물이 애도의 끝은 아니어야 한다. 핼러윈 날 이태원에 놀러 가서, 하필 그 골목에 들어선 피해자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 잘못된 시스템과 잘못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점을 명확히 밝히고 책임을 묻는 일이 진정한 애도의 방식일 것이다.
참사 이후 1주일 가까이 지나면서 속속 그날의 진상이 드러나고 있다. 조사 결과를 끝까지 지켜봐야겠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사항만 보더라도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을 가늠할 수 있다.
바로 권한과 책임이 있는 자리를 꿰찬 자들이 현장의 목소리, 위험 신호들을 묵살한 점이다. 이들이 이태원 파출소 경찰들의 지원 요청, 앞선 이태원 상인들의 건의, 발생 시점의 112 신고에 귀를 기울였다면 참혹한 결과가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의사 결정권자들의 안일한 인식에 위기 불감증이 더해져 대형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은 최근 금융시장의 비상사태와도 닮아 있다. 물론 이태원 참사는 생명이 달린 문제라는 데서 금융시장의 위기와 완전히 병렬시킬 수 있는 성격의 사안은 아니다. 그러나 금융시장의 소요는 숱한 사람들의 경제 상황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기업들을 위태롭게 한다는 점에서 안전사고와 종류는 다르지만 국민의 삶에 미치는 파급력 면에서는 그에 못지않은 중대 사안이다.
한동안 “금융시장에 불이 났다”는 ‘신고 전화’가 기자들에게까지 울려왔다.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도가 보증을 선 중도개발공사의 채무를 갚지 못하겠다고 한 후에 말이다. 한 금융사 대표는 격한 목소리로 “컨트롤타워인 당국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강원도지사의 ‘뻘짓’을 신속히 바로잡고 지방자치단체 보증채권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우는 동시에 유동성을 풀어 초기에 빨리 교통정리를 해줘야 한다. 안 그러면 신용위기가 터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각종 보도와 시장 지표들, 그리고 금융회사와 기업 관계자들의 구조 요청이 있었지만 금융 당국자들은 행동에 나서지 않다가 결국 한 달이 지나 자금시장이 쑥대밭이 되고서야 대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당국자들의 뇌리에는 ‘설마 금융위기가 벌어지겠나’라는 안일한 사고가 있지 않았을까. 마치 온갖 경고음에도 압사 사고를 떠올리지 못한 경찰청·용산구청·행정안전부·서울시 간부들처럼 말이다. 뒷북 대책 이후 금융시장은 참사 상황까지 치닫지는 않았지만 위기감이 여전히 팽배하다.
한때 선진사회·선진경제라고 믿었던 우리 사회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서울만큼 안전한 메트로폴리탄은 없다는 자부심이 시내 한복판에서 발생한 156명의 희생 앞에 단번에 무너졌다. 시민들은 더 이상 만원 지하철에 타는 일을 마음 편히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안전을 책임지는 부처의 보고 체계가 엉망이라는 점도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경제에 대한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글로벌 긴축 기조 속에 전 세계에서 최약체 수준의 증시, 가치가 최저치까지 떨어진 통화를 보유한 나라가 된 우리는 이제 금융시장이 별일 없이 연초 연말을 넘길지 걱정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두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가 실은 선진국이 아니었다는 황망한 자각이 드는 것은 혼자만의 일일까.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나. 이태원의 혼잡함이 참사로 이어지고 금융시장의 불안이 비상사태로 번진 가장 큰 원인을 바로잡는 것이 출발점이다. 현장의 절박함이 컨트롤타워의 사다리 끝에 제대로 전달되는 소통의 체계, 그리고 권한을 가진 이들이 그 크기만큼 책임 있게 행동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작동시키는 것이 애도이자 우리가 질 책임의 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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